정석구 선임논설위원
박계동 당시 민주당 의원(현 국회 사무총장)이 ‘노태우 비자금’ 관련 문건을 국회에서 흔들어 댄 것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10월19일이었다. 박 의원은 국회 대정부질의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이 400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차명계좌로 보유하고 있다며, 110억원이 예치된 예금잔고조회표를 제시했다. 이 문건은 비자금 수사의 단서가 되어 노태우,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으로 이어졌다. 문건 하나가 전직 대통령 2명을 구속하는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으레 말이 앞서기 마련인 정치인들에게 문건은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로 활용된다. 활자화된 문건은 말의 신빙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종종 엉터리 문건으로 국민을 속이는 경우도 있지만 문건을 증거로 제시하며 자신의 논리가 타당함을 입증하려는 행위 자체를 탓할 일은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지난주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문건을 가지고 나와 흔들었다. 김대중 정권 때는 43조원을 들여 강을 살려야 한다고 했고, 노무현 정권 때인 2007년에는 87조원을 들여 방재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문건 하나를 들어 보인 것이다. 그는 “(이런 거) 들고 다니는 거 싫은데 들고 나왔다”며 노무현 정부 때 만든 ‘신국가방재시스템 구축 방안’이란 보고서를 보여주었다.
이 대통령이 이런 문건까지 제시하며 주장하려는 건 분명하다. 전 정권에서는 무려 43조원, 87조원씩이나 들여 수해방지대책을 세웠는데, 자신은 22조원밖에 안 들여 2~3년 안에 4대강을 살리겠다는 걸 내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또 민주당 등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쪽에 ‘당신들도 이렇게 막대한 예산을 들여 강 살리기 사업을 계획했으면서 왜 내가 하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은 반대하느냐, 반대를 위한 반대 아니냐’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결국 4대강 사업의 타당성을 입증하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반대를 위한 반대론자’로 몰아붙이는 수단으로 그 문건을 활용한 셈이다. 청와대에서도 대통령의 문건 흔들기에 만족감을 나타냈다니 일단 소기의 성과는 거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통령의 문건 흔들기는 곧바로 거짓으로 드러났다. 전 정권에서 수립한 수해방지대책과 이 정부의 4대강 사업은 사업 대상과 방식 등이 전혀 달라 직접 비교가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2003년 마련한 수해방지대책은 2003~2011년 동안 42조7900억원을 들여 하천뿐 아니라 하천 유역을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치수 계획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만든 ‘신국가방재시스템 구축 방안’은 홍수 피해가 많은 지방 2급 하천 및 소하천 정비 등에 집중 투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4대강 위주의 사업과는 정반대의 접근 방식이다.
결국 이 대통령은 4대강 사업과 직접 비교할 수 없는 엉뚱한 문건을 국민 앞에 들이대며 4대강 사업의 타당성을 강변한 것이다. 점잖은 표현으로 사실 왜곡이고 아전인수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과 다름없다. 대선 과정에서 세종시 원안에 찬성했던 건 사실상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대국민 사기극’이었음을 자인하고 사과하는 자리에서 또다른 사기극을 아주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연출한 것이다.
물론 대통령이 그 문건의 상세한 내용을 몰랐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대통령은 잘못된 정보를 토대로 국민을 기만한 셈이 된다. 내용을 알고도 그랬다면 더욱 문제다. 이 대통령의 문건 흔들기가 어느 쪽인지 확인하는 건 간단하다. ‘신국가방재시스템 구축 방안’을 직접 읽어보면 된다. 10분이면 충분하다. (blog.hani.co.kr/twin86/24780)
정석구 선임논설위원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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