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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글쓰기의 자세와 언론의 책임 / 김삼웅

등록 2009-12-02 22:03수정 2009-12-08 11:07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중국 진나라 죽림칠현에 왕융이 있다. 그의 집에는 질 좋은 배나무가 있어 가을이면 탐스런 열매가 열렸다. 팔 때면 반드시 송곳으로 과일의 씨(核)를 뚫어서 팔았다. 번식을 막고자 해서다. 후대 사가들은 이를 ‘찬핵’(鑽核)이니 '찬리'(鑽李)라면서 지식인의 곡필에 비유했다. 곡필은 사람의 정신을 죽이는 찬핵과 같다는 것이다. 조선 인조 임금 때 삼전도의 굴복은 민족 만대의 치욕이다. 오준은 인조시대 명필이어서 왕의 명을 받고 청태종 공덕비문을 썼다. 뒷날 그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붓을 잡았던 손가락을 돌멩이로 짓이겨 다시는 붓을 들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파리가 해방되면서 수많은 나치의 ‘지적 협력자’들이 국외로 도피하거나 변명에 급급했다.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 따랐다. 그런 판국에 ‘특이한’ 사람도 있었다. 나치 협력 문인 드리외 라 로셸이다. 그는 “지식인과 언론인은 일반시민과 다르다. 이들은 다른 시민보다 더 높은 차원의 의무와 권리를 향유한다. 눈앞의 사건과 이해를 초월하여 역사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그럼에도 나는 나치에 협력하는 글을 썼다”는 참회의 글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단재 신채호는 베이징 망명 시절 유일한 생계수단이기도 한 <중화신보> 기고문에 어조사 ‘의’(矣) 자를 편집자가 임의로 뺀 것은 조선인을 깔본 처사라며, 사장이 직접 찾아와 사과를 해도 끝내 기고를 거부했다. 여순감옥에서 국내 신문에 ‘조선상고사’를 연재할 때 그 신문이 제호 옆에 일본 연호를 실은 사실을 알고는 연재를 중단했다.

지난 10월 ‘국경 없는 기자회’가 발표한 세계 언론자유지수 순위에서 우리나라는 전해보다 22위 하락해 69위를 기록했다. 2006년 31위, 2007년 39위, 2008년 47위로 가파르게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전 정권 때 한두 단계만 내려가도 난리를 치던 모습을 보이던 보수언론은 이명박 정부 들어선 이런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책임과 관련한 여론조사에서 검찰 56%, 언론 49%의 책임을 물었다.(<한겨레> 2009년 6월1일치) 한 신문사가 한국언론학회 회원 190명을 대상으로 한 ‘한국 언론 상황에 대한 진단 및 평가’에서 응답자의 49.5%가 언론 위기의 원인으로 ‘특정 정치세력에 편향된 태도’, 20.7%가 ‘소수 언론사의 언론시장 장악’, 19.0%가 ‘언론인의 전문성 등 자질 부족’을 들었다.(<미디어 오늘> 2008년 4월2일치)

보수신문들은 친일청산 작업을 ‘좌파’로 매도한다. 친일파를 옹호하기 어려우니까 색깔론으로 국민을 호도한다. “친일청산 문제가 한국에서 반세기 이상 중요사항으로 남아 있는 것은 한국의 법조계·정계·재계·언론계 등 모든 분야의 많은 엘리트가 일제 부역자들의 후손이거나 친일유산에서 직간접적인 혜택을 계속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엘에이 타임스> 2003년 8월26일치)

정부가 ‘종편’ 허가권으로 일부 언론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는 비판이 정치권에서 제기되었다. “이 정권의 세종시 원안수정에 대해 찬반양론이 극명하게 대립되어 있는 마당에 원안수정 반대론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수정론만 대서특필하는 것은 정권의 나팔수가 아니고 무엇이냐.”(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 2009년 11월26일)

‘선출되지 않는 권력’ 언론의 존재 이유와 가치는 사실보도와 논평의 공정성(fairness)·형평성(equity)에 있다. 이것을 파기한 언론은 곡필이고 흉기일 뿐이다. 언론의 각성이 요구된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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