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현 국민대 교수·소통학
엄기영 앵커는 <문화방송> 뉴스데스크의 대표적 얼굴로서 시청자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시청자들의 일상 속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친구이자 이웃집 아저씨로서 대한민국의 하루하루를 전달해왔다. 그는 14년 가까이 방송뉴스 앵커의 신화를 만들어왔다. 그사이 정치권으로부터 공천을 주겠다는 유혹도 많았지만 그는 일관되게 앵커석을 지켜왔다. 방송 앵커의 신화를 만들어온 사람이 지난해 문화방송의 사장이 된 것은 아름다운 일이었다.
그랬던 엄기영 사장이 지난 7일 경영진 전원과 함께 일괄사표를 냈다. 문화방송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는 10일 임시이사회를 열어 엄 사장의 사표는 반려하고, 티브이제작본부장, 보도본부장 등 핵심 본부장의 사표는 수리하였다. 엄 사장은 유임의 형식을 갖추었지만, 엄 사장과 함께 일했던 핵심 경영진이 교체되면서 실질적으로 불신임을 받은 모습이다.
이제까지 문화방송의 경영진은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개편된 방문진으로부터 수차례 경고를 받았다. 방문진 이사장은 물론이고 여당 쪽 이사들은 광우병 파동에서 비롯된 촛불시위 국면에서 정부에 비판적인 내용을 담아왔던 ‘피디수첩’과 ‘시사매거진 2580’, ‘뉴스후’, ‘100분 토론’ 등의 프로그램을 통합 내지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 방문진이 경영진을 압박하면서 정부에 비판적인 방송 프로그램 내용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오비이락인지 요즘 문화방송의 보도가 비판적인 내용은 축소되고 연성화되고 선정적으로 바뀌고 있다.
이번 문화방송의 핵심 경영진 교체는 방문진의 압력에 ‘백기투항’하라는 것을 뜻한다. 이미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공영방송의 경영진들이 하나둘씩 대통령의 사람들로 교체되었다. <한국방송>에서는 정연주 사장을 강제로 해임시켰고 이병순 사장을 앉혀 신뢰도를 저하시키더니 급기야는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방송전략실장을 지낸 김인규 사장을 앉히고 말았다. 이번 문화방송의 경영진 교체는 공영방송 위기의 징후를 숨김없이 보여준다. 엄 사장은 살아남았지만 문화방송의 독립성은 크게 훼손된 모습이다.
사실 공영방송에서 정치적 독립성이 없다면 국영방송이 되는 것이다. 정치적 독립성의 핵심적 장치는 경영진의 임기 보장과 편성 자율성 부여이다. 경영진에게 사표를 압박하면서 정부를 비판하는 프로그램을 폐지하라고 요구한다면 공영방송은 더는 공공성을 담보할 수 없게 된다. 공영방송의 경영진에게 임기 중에 사표를 내게 하고 재신임을 받게 한다면 공영방송의 독립성은 크게 훼손될 것이 분명하다. 공영방송은 국민의 비판적 목소리를 담아내는 소통의 장이 되지 못하고 대통령의 치적만을 강조하는 홍보매체가 될 것이다.
현재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세종시, 노동법, 아프가니스탄 파병안 등의 정책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려 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회 내에서도 정치가 실종되었다고 하며, 보수언론도 종편 허가와 관련한 사적 이익 때문에 정부 정책에 대한 사회적 감시의 고삐를 놓아버렸다는 지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영방송은 국민의 편에 서서 이명박 정부의 일방주의적인 정책을 비판하고 견제해야 한다. 정부를 비판하는 공영방송을 허용해야 민주주의가 살고 사회의 균형 있는 발전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번 방문진 결정은 문화방송의 핵심 임원진을 교체하면서 공영방송을 순치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렇기에 핵심 경영진의 교체를 막아내지 못한 엄 사장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과연 유임된 엄 사장이 공영방송의 의미가 퇴색해 가는 문화방송의 위기를 잘 극복해 나갈 수 있을까?
이창현 국민대 교수·소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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