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섭 논설위원
“광업소에서/ 나무를 짊어지는 일을 하고 와서/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신다./ 공부 잘해서 편히 살아라./ 그럴 때면 우리 식구는/ 아무 소리 안 한다.”
1980년대 초 “꾸미지 말고 솔직하게 쓰자”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강원도 사북 탄광촌의 초등학교 5학년생이 쓴 ‘일하고 오시면’이라는 제목의 시다. 공부 잘하라는 말에 왜 식구들은 아무 말 하지 않았을까? 정확히 알 길 없지만, <아버지 월급 콩알만 하네>라는 시집에 이 시와 함께 실려 있는 다른 시들을 읽어보면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아이들은 순수하고 맑지만 자신의 처지도 잘 안다. ‘나도 광부가 되겠지’라는 제목의 시는 “너는 커서 농부나 거지가/ 되었으면 되었지 죽어도/ 광부는 되지 말라고 하신다.”고 끝맺는다. 이 시집에는 가슴 아프게 하는 시가 많지만 특히 마음에 걸리는 시가 하나 있다.
“삼 학년 때/ 밥을 안 싸 가지고/ 갔기 때문에/ 배가 고파서/ 집으로 왔다./ 집에 오니 밥은 없었다./ 나는/ 너무 배고픈 나머지/ 아무나 때리고 싶었다.”(‘화난 내 얼굴’)
아이들의 눈에 비친 탄광촌의 현실이 30년 전 일이기만 할까? 지금도 비슷한 아이들이 얼마든지 있다. 배를 곯으며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잘해 편하게 살라고 하면 침묵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 말이다.
이런 아이들과 처지가 전혀 다른 서울의 초등학교 6학년생이 주변에 있다. 배를 곯아본 적도, 돈이 아쉬운 적도 없는 아이다. 요즘 ‘예비중1’을 위한 학원에 다니느라 고생하는 이 아이는, 한국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이 될 최소 조건이 뭔지 보여준다. 그전엔 영어학원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아이는 4학년 때 우연히 부모를 따라 영어를 쓰는 나라에 가게 됐다. 이 아이가 다니게 된 학교는 각 반에 담임선생을 돕는 보조교사가 한명씩 있었다. 보조교사의 주 임무는 공부가 미진한 아이를 돕는 것이었기에, 그는 이 아이에게 매일 한시간씩 영어를 가르쳤다. ‘영어 개인교습’은 6개월 만에 끝났는데, 도움이 필요한 다른 아이가 전학 왔기 때문이었다.
1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아이는 최근 어떤 학원의 ‘예비중1반 선발시험’을 봤다. 알고 보니 이 학원은 한해 수백명을 특목고에 보낸다고 내세우는 곳이었다. 아이는 영어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덕분에, ‘외고생’을 향해 가는 아이들 사이에 엉겁결에 끼어들었다. 3년을 잘 버티면 일부에서 “장래에 1만명을 먹여살릴 인재”라고 치켜세우는 집단에 들지도 모르겠다.
많은 또래 아이에겐 ‘이미 닫힌 문’ 하나를 통과했지만, 이 아이가 대단한 노력을 했다고 하긴 어렵다. 적당한 때 영어를 쓰는 나라에 갔고, 선생님과 친구들 덕분에 귀가 뚫리고 입이 열렸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국식 영어교육’에 적응했을 뿐이다. 외국 경험을 시켜줄 능력이 있는 부모를 뒀다는 게 특별하다면 특별하달까. 이 사례는 “국제경쟁력 있는 인재 양성”이라는 말 뒤에 숨은 게 무언지 보여준다. 고학력에다 돈에 쪼들리지 않는 부모 만나 외국 경험 좀 하면 ‘국제경쟁력 있는 인재’의 후보 정도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제 마침내 외고를 지켜낸 이들은 숨기고 싶겠지만 결코 감출 수 없는 진실이 있다. 외고 문제로 대표되는 교육 논쟁은 사실 계급 기득권 투쟁이라는 것 말이다. 또 그 기득권이 견고해질수록, 1980년대 사북의 배 곯는 아이처럼 “아무나 때리고 싶”어지는 사람들도 늘어나리라는 것 말이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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