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형석 대중문화팀장
“이 뼛조각요? 1970년대 관공서 행정봉투 안에 있더군요. 우리도 석달 전에 알았습니다.”
봉투가 유물 보관함이라고? 국립중앙박물관(이하 중박) 직원의 설명은 믿기지 않았다. 뼛조각은 웅진(공주)에서 백제 중흥의 기틀을 세운 25대 무령왕(재위 501~523)의 무덤 안에서 나온 것이었다. 71년 발굴 당시 무덤 바닥에서 쓸어담아 누런 봉투 안에 쑤셔넣어진 채 40년 가까이 박물관 정리실에 처박혀 있었다고 한다. 잠든 역사를 깨우는 문화재 발견에는 촌극 같은 일화들이 따라다니지만, 이 뼛조각 비화는 결코 웃으면서 들을 수 없었다.
최근 일부 언론은 국립공주박물관이 무령왕릉 유물들을 재조사하다 왕과 왕비 것으로 추정되는 뼛조각 4점을 찾아냈다고 알렸다. 뼈의 정체가 누구인지는 과학적 분석이 안 된 이상 아무도 모른다. 박물관 쪽은 당장 눈총을 받았다. 어떻게 관리했기에 지금껏 뼈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느냐는 힐난이었다. 정황상 변명의 여지가 별로 없지만, 내부 눈치를 보니 그게 아니다. “찾아낸 것도 다행이다”, 심지어 “억울하다”는 항변까지 있었다.
무슨 내력일까. 중박의 한 중견 간부는 “이번 소동은 1971년 왕릉을 졸속발굴한 원죄에서 전적으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바로 1971년 7월8일 무령왕릉의 유물들을 안전을 이유로 하룻밤새 몽땅 들어내버린 발굴 참사를 일컫는다. 사상 처음 무덤 주인의 실체가 확실한 백제 왕릉이 온전하게 발견되자 전문가들은 물론 전국에서 사람들이 떼로 몰려들었다. ‘빨리 무덤 속을 보여달라’는 아우성에 기가 질린 당시 국립박물관장 김원룡은 인근 여관에서 대책회의를 연 끝에 ‘벼락치기 반출’ 결정을 내린다. 4명이 두 조로 나눠 밤샘하며 8시간 만에 유물 수천점을 실어냈다. 문제의 뼛조각은 주요 유물들을 실어낸 뒤 빗자루로 유물 파편들이 흩어진 바닥을 쓸면서 대충 봉투 3장에 담아 직송한 것이었다.
당시 박물관과 문화재관리국 쪽은 후속 보고서 작업을 벌였지만, 무덤 안 실측을 제대로 하지 않은 탓에 덩치 큰 유물들 소개에만 급급했다. 이 와중에 나무 부스러기로 분류된 봉투 속 뼛조각은 누구도 눈길 주지 않은 채 파묻혔다. 38년이 흐른 지난 9월 새 보고서 작업을 추진하면서 평소 무령왕릉에 관심 있던 학예사 한 명이 봉투 속 뼈를 눈여겨보고 상부에 보고했다. 그 덕분에 이 유물은 다시 알려지게 됐다.
무덤 주인의 실상을 밝히는 주요 단서인 뼛조각을 방치한 책임에서 중박은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부실 정리의 원죄가 있는 당시 발굴 관계자들은 대부분 저세상 사람이 됐다. 중요 유적 발굴품에 대한 정보가 지속적으로 관리되고 전수되지 않은 탓에 책임을 따질 대상이 없다. 박물관에는 소장품 내력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유물을 그냥 놔두는 관행이 있다. 특정 유물의 내력에 대한 지식과 관심을 갖는 이가 없다면, 수장고 속에 영원히 묻힐 수도 있다. 수장고의 다른 유물들도 비슷한 처지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과거 중요한 기념비적 발굴 사례들에 대해서는 국가 차원에서 확실한 유물 분류·연구가 꾸준히 진행될 수 있도록 국책사업으로 인프라를 보강해주는 보완책이 절실하다.
무령왕릉 뼛조각은 입만 열면 박물관 100주년을 이야기했던 국립박물관이 핵심 업무인 유물 보관·분류에서 수십년 묵은 관행을 답습했고, 지금도 학예사 개개인의 관심에 따라 중요 유물의 존망이 좌우될 수 있다는 현실을 웅변한다. 누구는 이번 해프닝을 무령왕릉의 복수라고도 했다. 하지만 망자들은 유물로 말없이 질책할 뿐이다. 그 무언의 질책을 새겨야 한다.
노형석 대중문화팀장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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