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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오시비엥침’으로 가는 길 / 신영전

등록 2009-12-11 20:43

신영전  한양대 의대 교수·사회의학
신영전 한양대 의대 교수·사회의학
학회 차 폴란드를 다녀왔습니다. 학회 일정 중에는 오시비엥침 참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오시비엥침’은 ‘아우슈비츠’의 폴란드식 이름입니다. 폴란드인은 자기 땅이 폴란드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했습니다.

그곳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각자를 소개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온 한 노인은 자기 가족이 그곳에서 죽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다른 몇몇 사람들도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르완다 출신 벨기에인은 르완다 학살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슬픔은 또다른 슬픔과 자연스레 이어졌습니다. 또 여행자 중에는 독일인도 몇몇 끼어 있었습니다. 오시비엥침에서는 약 110만명의 유대인, 집시, 폴란드 정치범이 가스실과 고문 등 잔혹한 방법으로 죽어갔습니다.

하지만 도착해서 바라본 그곳의 겉모습은 너무나 평범했습니다. 아렌트의 말처럼 악은 너무나 평범하게 우리 곁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스실과 화장터, 인체실험병동을 돌아보는 시간은 고통스러웠습니다. 어두침침한 가스실에 들어서자 마치 우리가 끌려온 유대인인 양 공포감에 떨었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어린아이들의 신발더미 앞에서 많은 이들은 깊은 탄식을 뱉어냈습니다.

참관은 세미나로 이어졌습니다. 집단학살에서 의학과 공중보건 전문가들이 어떤 구실을 했는지에 대한 역사가 소개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일할 수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분류하는 일을 기꺼이 맡았습니다. 어린이들에게 균을 주사하고, 여인들에게 방사선을 쪼이면서도 거기에서 얻은 결과물을 전리품인 양 자랑했습니다.

세미나 발제를 맡았던 엘리우 교수는 “제노사이드(대량학살)는 인간의 ‘선택’이자 그 옆에 서 있는 사람의 ‘무관심’에서 비롯된다”고 말했습니다. 또 그는 “아우슈비츠는 돌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미움의) 말로 세워졌다”는 헤셸의 말을 인용하며, 다른 이들을 향한 저주의 말들이 모여 결국 아우슈비츠를 낳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세미나 말미에 한 노인이 일어섰습니다. “오늘 나는 너무나 슬픕니다.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여기에서 죽어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분노가 아니라 평화적인 방식으로 풀어야 합니다.”

그의 발언은 격앙되어 있던 우리를 숙연하게 만들었습니다. 돌아오는 버스 안은 하루의 피로와 함께 무거운 정적이 흘렀습니다. 저는 그때 우리나라를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아픔의 역사가 있습니다. 간토(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일본 731부대의 만행, 6·25전쟁 때 양민학살, 보도연맹 사건, 그리고 가깝게는 베트남 전쟁도 있습니다. 우리는 늘 피해자였던 것이 아니라 때로는 가해자였다는 사실이 제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 역사는 과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진행중입니다. 이 시간에도 ‘우승열패’의 신화 속에 내몰려 때때로 죽음을 선택하기도 하는 이 땅의 청소년들, 300일 넘게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는 용산참사의 희생자들, 고공에서 수십일째 단식농성을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모습이 오버랩되었습니다. 또한 정부가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강행하려는 이 상황은 오시비엥침은 폴란드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바로 우리 곁에 있을 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갑자기 저는 ‘우리 안의 파시즘’이 몸서리쳐지게 두려워졌습니다.

문득 오시비엥침 참관을 시작하는 곳에 붙어 있던 산타야나의 글귀가 생각났습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사람은 그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하지만 그곳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너무나도 천연덕스럽게 푸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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