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표 언론인
‘멍석을 깐다’는 말이 있다. 한판 굿이나 놀이가 예정되면 마당에 멍석을 깔아 준비한다. 이 말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미리 분위기를 잡아주는 경우에도 쓸 수 있다. 이때 멍석 까는 일을 언론이 곧잘 한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이건희 삼성그룹 전 회장 사면 문제 보도에서도 본다.
얼마 전 강원도와 체육계에서 이 전 회장 사면을 원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언론은 이를 중계방송 하듯이 보도하면서 분위기를 잡아갔다. 국가적 숙원사업인 겨울올림픽 유치를 위해서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들과의 친분이 두터운 이 전 회장이 나서야 한다. 그런데 그는 현재 유죄가 확정된 상태라 올림픽 유치 로비에 나설 수가 없다. 따라서 올림픽을 성사시키기 위해 그에 대한 사면이 불가피하다는 논리다.
이 전 회장에 대한 사면 요구가 언론에 의해 확산되자 재계에서도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이번에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이 전 회장이 사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를 받아 한나라당 내에서도 사면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견이 나왔다. 한편 정부는 사면 검토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으며, 청와대는 사면 문제에 대한 여론의 추이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 같다. 이와 같이 사면 요구가 우리 사회의 주요한 의제로 만들어져 가는 과정에 바로 언론의 멍석 깔기가 기여하고 있다.
사면 요구가 나온 것은 사실이니, 사실보도는 해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다. 사면 요구를 보도하면서 비판적인 의견도 덧붙이면 균형 잡힌 보도가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언론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나 먹혀들 수 있는 변명이다. 찬성이든 반대든 논란이 일고 있다는 보도는 그 주제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고, 그것은 일을 추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언론이 기계적인 균형을 잡으면 독자들은 대체로 찬성 쪽 의견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언론은 모든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에 의한 편집 과정을 거친다. 누구누구에 대한 사면 요구가 나온다는 것 자체는 뉴스가 아니다. 이것이 뉴스가 되려면 편집자의 관점이 들어가야 한다. 사면 요구가 말이 안 된다거나 아니면 사면 요구 자체가 매우 용기 있는 태도라거나 하는 등의 판단을 하고, 이 판단에 따라 묵살하거나 주요기사로 보도하거나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 회장에 대한 사면 요구는 용기 있는 태도의 범주에 넣기는 어렵다.
사면 요구에 대한 반대의견을 낸 신문도 있다. <한겨레>는 이 전 회장의 경우 부실 수사에 가벼운 처벌이라는 비판이 거센데, 그마저 4개월 만에 사면으로 지워버리려 한다면 최소한의 사법 정의마저 무너질 것이라는 취지의 사면 요구 비판 사설을 내보냈다. 하지만 이런 목소리는 사면 요구만 열심히 보도하고 아무런 의견도 내놓지 않는 대다수 언론들에 눌려 거의 들리지 않는다.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는 지금 보도되고 있는 사면 요구에 대해 “이른 감이 있다”고 말했다. 건전한 양식을 가진 언론인이라면 그의 지적에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이 전 회장에 대한 사면 요구가 무리라는 것쯤은 판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면 방침을 정하고 여론을 살피고 있는 정부로서는 사면 요구에 대한 언론 보도가 멍석 깔기처럼 바람직하게 보일 것이다. 뜬금없이 들릴까봐, 또는 비판여론이 두려워 사면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못하는 정부에 언론의 사면 보도가 자연스러운 기회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성한표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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