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얼마 전 한반도평화포럼 월례토론회에서 ‘북한의 화폐개혁이 북핵 문제에 미칠 영향’을 묻는 질문이 나왔다. 꽤나 거리가 있어 보이는 두 문제의 상관성에 대해 나는 좀 장황하게 대답했다.
“전문가들이 전망하듯이 북한의 화폐개혁은 현재 생활필수품 대부분을 공급하는 사적 시장을 위축시킬 것이다. 국가는 치솟는 인플레를 잡고 장마당으로 나온 노동자들을 다시 기업으로 흡수하여 공장을 가동하고 여기서 생산되는 물품을 주민들에게 공급하는 선순환 체계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들의 직장 복귀를 유도하기 위해 100배 절상된 신권으로 기존 월급을 그대로 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공장으로 돌아가도 기계를 돌릴 원자재가 없다. 국가가 주민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지 못하면 인플레는 다시 춤을 출 것이고, 사람들은 굶지 않기 위해 너나없이 장사에 나서 화폐개혁은 하나 마나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북한 당국이 활용할 수 있는 내부 자원은 고갈되어 있다. 원자재건 생활필수품이건 외국에서 들여오지 않으면 이 조처는 성공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대외경제관계의 확대를 통해 외부 자원을 유입하는 것이 화폐개혁 성공의 열쇠가 된다. 여기서 북핵 문제가 위기로 치닫게 되면 어느 나라도 북한과의 경제협력을 꺼릴 것이기 때문에 화폐개혁은 북핵 문제를 진전시키는 데 플러스라고 본다.”
최근 중국을 방문하여 북한과 중국을 오가며 교역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화폐교환 후 북한의 밑바닥 사정을 들었다. 화폐교환이 시작되면서 북한 경제는 심각한 혼란에 빠져 시장에서 거래가 뚝 끊겼고, 다시 굶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화교나 무역상들로부터 중국 물건을 받아다가 장마당에 내다 파는 하루벌이에 급급한 영세상인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북-중 교역이 아닌 국내에서 물건을 조달하여 파는 장사꾼들도 거래대금조로 북한 돈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다가 큰 낭패를 보았다. 반면 일부 전문가들의 관측과는 달리 실제 시장의 큰손들인 화교 사업가와 대형 무역상들은 단기운용자금을 뺀 나머지 돈을 인민폐나 달러로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타격이 적었다.
이번 화폐개혁이 시장경제의 성장을 통제할 것이라고 하는데, 역설적이게도 그 성패가 자원조달의 유일한 해결책인 대외개방에 달려 있음도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최근 북한과 중국은 오래전에 휴지통으로 들어간 줄 알았던 두만강 경제개발 계획서를 다시 꺼내놓고 검토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아마 북한이 대외개방을 한다면 2000년 이후 구상해온 중국식 개방전략과 남한의 박정희식 발전 노하우를 결합한 ‘제한적인 경제발전 전략’으로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공산당 독재를 보장하면서 우선 경제특구 개발을 중심으로 시장경제의 점진적 확대를 추구한 중국식 사회주의 개방 모델과, 우수한 노동력은 있으나 자원의 결핍으로 고통받는 상황에서 국가가 권위주의적으로 전체 경제를 계획하고 발전을 주도해 나간 박정희식 방식에 관심을 가져왔다. 김정일의 두 차례에 걸친 중국 개혁개방지구 방문(2001, 2006)과 경제시찰단의 남한 방문(2002), 신의주 특별행정구역 설치(2002), 개성공단 개발(2003), 남한과 해주경제특구 합의(2007)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것은 북핵 문제의 영향으로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특히 이 구상은 군사적 긴장 고조에 예민한 비무장지대(DMZ) 근방, 국경 및 해안지역 등 접경지역의 개방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제재와 협상이 교차하는 상황에서는 사실상 추진이 어렵다. 이렇게 볼 때 북한 화폐개혁의 성공 여부는 가까이는 경제개방의 추진과 상관성을 가지며 멀리는 북핵 문제의 진행 상황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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