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순 대기자
2004년 1월 일본의 대학입시센터 세계사 시험에 식민지 조선이 출제됐다. 일본 통치하의 조선에 대해 옳은 설명을 고르라는 사지선다형 문제다.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총독부가 설치돼 초대 총독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했다. 2) 조선은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처음으로 획득한 해외영토였다. 3) 일본에 의한 병합과 동시에 창씨개명이 실시됐다. 4) 2차세계대전 중 일본에 강제연행이 행해졌다.
당시 역사를 제대로 배운 학생이라면 정답 4번을 찍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전후 역사교육이 잘못됐다며 새 교과서 제작운동에 앞장선 국수적 학자의 눈에는 이 문제가 ‘좌익 시험’으로 비쳤다. 후지오카 노부카쓰는 “징용은 일본인에게 평등하게 부과된 합법적 행위이고 당시 조선반도 사람들도 일본인이었다”고 말하고 “강제연행이란 용어가 사용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입시를 이용해서 강제연행의 강제를 허용해선 안 된다”고 궤변을 폈다.
패전 후 상당기간 일본에서 관변 식민사관에서 벗어나 조선사를 연구하는 학자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현대사 연구자 가운데 예외적 존재를 든다면 야마베 겐타로가 있다. 1905년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소학교를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다. 그럼에도 명문출판사에서 <일한병합소사> <일본통치하의 조선> 등의 저서를 냈다. 이 책들은 독도 문제를 다룬 논문집과 함께 번역돼 국내에 소개됐다.
그가 77년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회고록 격인 <사회주의운동 반생기(半生記)>라는 책이 출판됐다. 건강이 악화돼 연구자들이 구술을 받아 정리했다. 제목에서 나타나듯 그는 어렸을 때부터 노동·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1921년 오사카에서 첫 메이데이(노동절) 행사가 열렸을 때 현장에 있었다. 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29년 체포돼 3년 넘게 형무소에서 살았고 41년 다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됐다. 전향을 거부해 일제의 항복을 예방구금소에서 맞았다. 전쟁 말기 미군 폭격기가 공습을 오면 피수용자들은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고 한다.
옥중의 공산주의자들은 일제의 항복으로 정치범들이 풀려날 때 함께 석방되지 않았다. 거의 두 달이 지난 10월10일에야 점령군사령부의 조처로 풀려났다. 야마베의 증언을 보면 9월 들어 처음으로 면회 온 사람이 있었는데 조선인이었다. 정치범 석방 촉진연맹을 결성한 것도 조선인이었고, 야마베가 함께 수감됐던 조선인 공산주의자 김천해 등과 함께 후추형무소에서 나왔을 때 몰려온 환영인파도 대부분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전후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공산당을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오랜 기간 외경의 마음을 가졌던 것은 군국주의에 대한 자체의 저항운동이 아주 미약했기 때문이다. 반전운동은커녕 영장이 나오면 끽소리 못하고 입대한 처지여서 옥중에서 천황제와 제국주의 전쟁 반대 투쟁을 관철한 공산당 지도부에 콤플렉스를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미약한 저항운동을 지탱했던 것은 조선인들이었다. 야마베는 패전 뒤에도 겁을 집어먹고 면회조차 오지 않은 일본인들이 비겁하다고 썼다.
올해도 이제 열흘밖에 남지 않았다. 새해를 맞으며 상기할 것 가운데 국치 백년이 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당한 고통의 역사적 청산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망언은 일본 국수주의자들의 전용물이 아니다. 근대화 논리로 식민지지배를 긍정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도 활개를 친다.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지난 역사를 복합적으로 봐야 국치 백년을 극복할 수 있다.
김효순 대기자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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