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상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지난 2007년 투명하고 합리적인 양형 기준을 마련하기 위하여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출범하였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양형을 실현함으로써, 가해자에게는 적절한 처벌을, 국민에게는 사법에 대한 신뢰를 높여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활동한 지 2년여 만에 8가지 범죄 유형의 양형 기준을 마련하여 내놓았다. 8가지 범죄 유형에는 성폭력 범죄도 포함되어 있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를 만나면서 상담과 지원 활동을 하는 현장에서는 처음으로 마련되는 양형 기준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힘들게 유죄를 입증하고도 어이없는 이유로 양형이 감경되거나 집행유예가 선고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공정하고 객관적인 기준이 마련되기를 기다렸던 터다.
올해 우리 사회를 분노와 안타까움으로 몰아넣었던 어린이 성폭력 피해 사건을 통해서도 널리 알려졌듯, ‘음주’는 가해자가 심신미약 상태나 범죄의 우발성을 주장하는 전형적이고도 강력한 이유다. 이 사건에서도 가해자는 나이 어린 취약한 피해자를 지목하고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유인하여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재판부는 만취 상태였다는 가해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심신미약을 인정하고 감형해 주었다. 비단 이 사건에서뿐만 아니라 음주는 성폭력 범죄 판결문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감경 사유다. 대체로 피해자를 물색하여 유인하거나 범죄를 은닉하기 위한 조처를 하는 등 계획적 범행을 입증할 수 있는 명백한 정황이 있는데도, 음주를 심신미약이나 우발적 행동을 입증하는 요소로 손쉽게 받아들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성폭력 범죄는 가해자에게 온정적 태도를 취하는 반면 피해자에게는 범죄를 유발한 책임을 묻는 기형적인 특징을 갖는 유일한 범죄다. 성폭력 범죄 재판은 ‘피해자 재판’이라고 이를 정도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아는 관계인지, 가해자가 암묵적 동의로 혼동할 만한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었는지 샅샅이 찾는 일이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일어난다. 통계 분석을 참고해 보아도, 피해 장소가 숙박업소이거나, 피해자가 유흥업소 종사자이거나, 피해 이전에 술을 마셨을 경우 집행유예 비율이 높고 선고 형량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사이가 지속적 친분관계인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실형 비율도 낮고 선고 형량도 낮았다. 성폭력 범죄를 인권침해 행위로 보기보다는, 성을 둘러싼 갖가지 통념에 기대어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편견과 관행에서 ‘음주’는 가해자에게 온정적 선고를 할 수 있는 일등공신으로 부족함이 없다. 술에 취했기 때문에 욕정을 다스릴 수 없었고 욕정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공정함도 투명함도 없다. 다만 ‘성폭력은 성욕 때문에 발생한다’는 뿌리 깊은 통념과 ‘술에 취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범행’이라는 관용적인 판결문 문구만이 무성하다.
21일, 성폭력 범죄의 양형 기준을 다시 검토하기 위하여 양형위원회가 열린다고 한다. 여성단체 등은 성폭력 범죄의 양형을 판단할 때 고려되어서는 안 되는 요소로 음주를 명시해야 한다는 의견과 함께 이에 동의하는 2만2401명의 서명을 받아 양형위원회에 제출하였다. 법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형평성과 보편성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여성단체 등의 주장은 성폭력 범죄에만 예외를 인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편견 때문에 가해자가 응분의 처벌을 받지 않게 되는 예외적인 사태를 막자는 것이다. 잘못된 판단과 관행을 바로잡는 첫 발걸음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한다.
이윤상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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