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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새해에는 삶의 지혜를 나누자 / 신기섭

등록 2009-12-28 19:26

신기섭 논설위원
신기섭 논설위원
연말이 어느 때보다 우중충하게 느껴진다. 연초에 터진 용산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은 일년 내내 싸우느라 지칠 대로 지쳤다. 정부, 여당, 보수언론의 공세에 시달린 공무원노조는 결국 법외 노조로 새해를 맞아야 할 판이다. 전교조 위원장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20년의 사건이 한꺼번에 쏟아진 느낌이 드는 한해’였다고 했다. 농민들은 폭락하는 쌀값에 시름이 깊어지지만, 요즘엔 주목조차 받지 못한다. 이들만 힘겨운 한해를 보낸 건 아니다. 평범한 이웃 대부분에겐 삶이 그 자체로 투쟁의 연속이다.

세상에 싸움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또 많은 이들은 내년에도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부가 수많은 집단을 적으로 돌리는 정책을 포기할 것 같지 않은 까닭이다. 이렇게 내년에도 싸움을 피할 길 없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상황을 지혜롭게 대처할 판단력이 아닌가 싶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10여년 전 일이 떠올랐다. 당시 파업 등 노동문제를 취재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노사협상 결과를 여러번 봤다. 오랫동안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노조가 얻은 결과들이 보통 시원치 못하고, 독소조항이 숨어 있는 합의안을 받아들이는 일도 흔했다. 저 정도의 결과를 위해 그토록 열심히 싸웠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즈음 캐나다의 심리학 교수인 스탠리 코렌이 쓴 <잠 도둑들>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잠을 빼앗아가는 현대사회를 고발하고 잠을 많이 자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는데, 내 눈길을 끈 것은 노사협상과 잠의 관계에 관한 대목이었다. 한 협상 중재자는, 노사 대표들의 잠을 빼앗은 뒤 협상을 자기 의도대로 이끌어가는 수법을 소개한다. 중재자는 협상장에 커피를 잔뜩 가져다놓아 대표들이 카페인에 절어서 잠을 못 자게 만든다. 하지만 자신은 절대 커피를 마시지 않고 숙소도 협상장 근처에 마련해 충분히 잠을 잔다. 며칠 동안 이렇게 잠을 빼앗은 뒤, 밤샘협상을 유도해 새벽녘에 세부사항을 얼렁뚱땅 합의하게 만드는 게 이 중재자의 수법이다. 잠이 부족해 판단력이 흐려진 협상 대표들은 맨정신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도 받아들인다고 한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뭔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협상장을 나서던 한국의 노조 대표들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노조 대표들의 판단력을 떨어뜨리는 게 잠 부족만은 아니었다. 정부·경찰·언론의 온갖 공세와 심리적 압박도 냉정한 판단능력을 잃게 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실제로 확실한 판단이 서지 않은 채 결단을 내려야 하는 막바지 협상이 정말 힘들었다는 노조 관계자들이 꽤 있다. 그러니 노조가 판판이 당하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지금 곳곳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이들도 고립감과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막막함에서는 이와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워낙 동시다발적으로 문제들이 불거지니, 연대라는 것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수록 각 집단은 점점 더 고립되어 자신들의 문제에만 매달리게 된다.

고난의 시대를 헤쳐갈 현명한 대처법이 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급할수록 여유를 갖고 주변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꼭 농민과 철거민이 만나고, 공무원노조와 전교조가 만나야만 하는 건 아니다. 전쟁 같은 삶을 이어가는 이웃들과 서로 고통을 이야기하고 그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아 나누는 게 필요하다. 결국 희망은 누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키워야 하니까.

신기섭 논설위원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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