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섭 논설위원
연말이 어느 때보다 우중충하게 느껴진다. 연초에 터진 용산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은 일년 내내 싸우느라 지칠 대로 지쳤다. 정부, 여당, 보수언론의 공세에 시달린 공무원노조는 결국 법외 노조로 새해를 맞아야 할 판이다. 전교조 위원장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20년의 사건이 한꺼번에 쏟아진 느낌이 드는 한해’였다고 했다. 농민들은 폭락하는 쌀값에 시름이 깊어지지만, 요즘엔 주목조차 받지 못한다. 이들만 힘겨운 한해를 보낸 건 아니다. 평범한 이웃 대부분에겐 삶이 그 자체로 투쟁의 연속이다.
세상에 싸움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또 많은 이들은 내년에도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부가 수많은 집단을 적으로 돌리는 정책을 포기할 것 같지 않은 까닭이다. 이렇게 내년에도 싸움을 피할 길 없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상황을 지혜롭게 대처할 판단력이 아닌가 싶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10여년 전 일이 떠올랐다. 당시 파업 등 노동문제를 취재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노사협상 결과를 여러번 봤다. 오랫동안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노조가 얻은 결과들이 보통 시원치 못하고, 독소조항이 숨어 있는 합의안을 받아들이는 일도 흔했다. 저 정도의 결과를 위해 그토록 열심히 싸웠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즈음 캐나다의 심리학 교수인 스탠리 코렌이 쓴 <잠 도둑들>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잠을 빼앗아가는 현대사회를 고발하고 잠을 많이 자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는데, 내 눈길을 끈 것은 노사협상과 잠의 관계에 관한 대목이었다. 한 협상 중재자는, 노사 대표들의 잠을 빼앗은 뒤 협상을 자기 의도대로 이끌어가는 수법을 소개한다. 중재자는 협상장에 커피를 잔뜩 가져다놓아 대표들이 카페인에 절어서 잠을 못 자게 만든다. 하지만 자신은 절대 커피를 마시지 않고 숙소도 협상장 근처에 마련해 충분히 잠을 잔다. 며칠 동안 이렇게 잠을 빼앗은 뒤, 밤샘협상을 유도해 새벽녘에 세부사항을 얼렁뚱땅 합의하게 만드는 게 이 중재자의 수법이다. 잠이 부족해 판단력이 흐려진 협상 대표들은 맨정신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도 받아들인다고 한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뭔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협상장을 나서던 한국의 노조 대표들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노조 대표들의 판단력을 떨어뜨리는 게 잠 부족만은 아니었다. 정부·경찰·언론의 온갖 공세와 심리적 압박도 냉정한 판단능력을 잃게 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실제로 확실한 판단이 서지 않은 채 결단을 내려야 하는 막바지 협상이 정말 힘들었다는 노조 관계자들이 꽤 있다. 그러니 노조가 판판이 당하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지금 곳곳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이들도 고립감과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막막함에서는 이와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워낙 동시다발적으로 문제들이 불거지니, 연대라는 것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수록 각 집단은 점점 더 고립되어 자신들의 문제에만 매달리게 된다.
고난의 시대를 헤쳐갈 현명한 대처법이 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급할수록 여유를 갖고 주변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꼭 농민과 철거민이 만나고, 공무원노조와 전교조가 만나야만 하는 건 아니다. 전쟁 같은 삶을 이어가는 이웃들과 서로 고통을 이야기하고 그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아 나누는 게 필요하다. 결국 희망은 누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키워야 하니까.
신기섭 논설위원marishi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