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남 소설가
- 백범이 꿈꾼 ‘아름다운 나라’를 다시 읽다 -
<김구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다>를 읽었다. 최근에 출간된 아이들을 위한 인물 이야기인데, 다른 사람 아닌 백범의, 그것도 아름다운 나라에 대한 꿈은 과연 어떤 모양일까? 모처럼 어린 독자로 돌아가 머리에 새로 그림을 그리듯 찬찬히 책장을 넘겼으나 쉽지 않았다. 밤을 도와 <백범일지>를 탐독한 추억과 김신 선생 댁에서 임시정부 국무원 용지에 깨알같이 쓴, 어미가 ‘거시다’ ‘임니다’인 국한문 혼용 원고를 직접 본 감동 등이 꾸역꾸역 되살아난 탓이다. 아슴푸레 떠오른 선지식의 역사가 노년의 아이 되기 기분을 방해한 셈이다. 옛이야기처럼 구수하게 써내려간 책은 ‘청년백범’이라는 연구모임이 짓고 박시백 화백이 그림을 그리되 기왕의 위인전과 달랐다. 재주가 출중했다거나 슬기롭고 용감했다는 따위 될 성부른 나무의 떡잎 칭찬은 하나도 없고 개구쟁이 ‘창암이’(백범 아명)의 평범한 면모와 낭패를 여지없이 까발렸다. 유·청년 시절 묘사 중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아무리 거울을 들여다보아도 천하고 가난하고 흉한 모습뿐이었습니다. 짐승처럼 산다면 모를까 인간으로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사람 노릇을 하자면 ‘마음 좋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믿으며 의리, 판단, 실행, 계속을 목표로 삼는다. 종당엔 ‘백범’으로 호를 지어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만고에 유명한, ‘부강한 나라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소망하고 나섰다. ‘높은 문화’가 살아 숨쉬는 나라를. 좀처럼 정부 비판 기사를 찾기 힘든 메이저 언론에서 힘을 얻는가. 자신에 넘치는 만큼 반대편 사람을 무시하고 시삐 본다 더 보태고 뺄 것이 없는 애국 애족의 화신이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적에도 늘 우파를 대표했던 본받을 만한 왕보수가 분명하다. 그런데도 돌아온 조국에서 ‘의사(擬似) 민족주의’ 혐의에 좌파 모함까지 받았다. 정치적 마이너에 대한 배려나 존중이 전혀 없는 승자독식 사회의 야멸친 농단이자 해코지였다. 10만원권 지폐의 초상 계획도 석연찮은 이유로 취소되었다.
문제는 이런 기류가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엠비정부 들어 더욱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덜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수틀리면 색깔론을 펴 탈이다. 그런다고 한 시대 두 시대 저쪽 일을 끌어내다 못해 견강부회를 놀 참이냐고 윽박지를 수도 있겠으나 내림인즉 비슷하다. 어느 하늘 아래 이다지도 길고 끈질긴 입말의 속절없는 갈등이 또 있을까 싶다. 친구지간에도 서로 어느 편인가를 살피며 자칫 얼굴을 붉히기 쉽다. 오죽하면 정치 담론을 아예 금기사항으로 못박는 동창회 또한 쌨다. 모종의 조건반사 현상이라고나 할까. 색깔 소리만 나오면 애먼 사람 잡는다고 질색하는 재미가 들어 일단 해놓고 보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만이지 웬 호들갑이냐고 여유를 부리는 사이에, 듣는 쪽은 듣는 쪽대로 남우세스러운 감정마저 느끼지 말란 법 없다. 현대사의 슬픈 곡절과 짙은 음영을 순식간에 상기시키는, 많이 배운 이들이 어쩌자고 더 선호하는 색칠 이전에 ‘꼴통 보수’가 물론 있었다. 하지만 파괴력이나 약발은 당국의 협조가 어느 쪽으로 더 쏠리느냐에 달려 있고 그 차이는 말도 못하게 크다. 작정하고 골수 사회주의 이념을 키우고 전파를 마음먹는다면 모를까 보통사람들의 일상 언행은 실상 어느 한쪽에 빳빳이 기울기도 어렵다. 아침에는 보수적으로 반대하다가 저녁엔 진보적으로 찬성하는 둥 생각이 오락가락 바뀌는 수가 일상에 흔하다. 지극히 일방적이고 쓸데없이 고집만 피우는 북한에 학질을 떼다가도 너그럽게 도와줘야지 어쩌겠느냐는 선의의 발동에 절로 너그러워지는 날도 있다. 그래서도 이명박 대통령의 ‘중도 실용’을 일단은 주목했다. 하나 돌아가는 낌새가 오히려 심상찮다. 무엇에 쫓기듯 본인과 주변 인물들의 언행이 갈수록 드세고 뻐세다. 가다가는 ‘그럽시다’ 하고 못 이기는 척 대통령의 지분도 조금 내주고 꺾이는 멋도 있어야 보는 맛도 나겠는데 영 아니다. 집권 초기 전라도에 가서 뽑은 전봇대같이 직립을 일삼아 타협, 토론, 양보, 악수로 난제를 조금이나마 푸는 수완을 보기 어렵다.
그림 이보름 boreuml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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