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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단순한 것이 제일이다 / 여현호

등록 2010-01-07 21:59

여현호  논설위원
여현호 논설위원




폭설에 쫓겨 일찍 귀가한 지난 월요일, 텔레비전 드라마 <공부의 신>을 봤다. 폐교 위기의 고등학교를 살리기 위해 성적이 좋지 않은 3학년 학생들을 최고 대학에 보내려 한다는 내용이다. 원작이 일본 만화 <최강 입시전설: 꼴찌, 동경대 가다!>라니, 극중 국립 천하대로 진학시키는 성공담이 곧 이어질 것이다.

드라마의 시청률은 꽤 높다. 꽃미남 배우도 한몫했겠지만, 그보다는 누추한 우리의 교육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통쾌한 역전을 예고하는 극적 장치가 눈길을 끌었을 것이다. 학벌주의를 벗지 못한 드라마의 출발점이 불편하긴 해도, 많은 이들에게 입시는 인생을 건 전쟁이라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더구나 지금은 대학입시철의 한복판이다. 대리만족이든 뭐든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다. 현실은 또 다르다. 어려운 가정환경이나 지지부진했던 성적 따윈 훌훌 털어버리고 지금부터라도 머리띠 질끈 동여매고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 갈 수 있다는 희망은 20~30년 전에나 통했던 신화일 수 있다. 3년 내내 한눈팔 틈을 주지 않는 지금의 숨막히는 경쟁 체제에선 단기간의 역전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수능·내신·논술에서 두루 흠이 없을 것을 요구하는 현실의 ‘천하대’ 서울대는 더더욱 힘들다. 사교육 없이 학교 수업만으로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뉴스가 된다. 그런 길이 앞으로는 넓어질까?

같은 날, 이명박 대통령은 새해연설에서 교육개혁 문제를 직접 챙기겠다며,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있는 환경을 꼭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입학사정관제를 주요 해법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공정성을 위해 입학사정관제 기준 마련까지 지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바로 그런 ‘기준’이 또다른 사교육을 만들어낸다. 기준에 맞춰 점수를 따려는 요구가 있는 탓이다. 이미 지난해 말 서울 강남의 학원가에는 독서이력 관리 코스가 나왔다. 희망 학과에 맞춰 독서목록을 짜고 그럴듯한 리포트 등 성과물로 만들어내거나 관련 활동과 연계시켜 입학사정관 심사 때 좋은 점수를 받도록 해주겠다는 것이다. 모의 유엔회의, 모의 국회, 모의 법정 열풍도 거세다. 참가비만도 수십만원이고, 준비에도 적잖은 학원비가 든다. 그런 ‘조건’ 마련을 관리해주고 월 수백만원을 받는 전문 컨설턴트까지 있다고 한다. 기준을 정하고 점수를 매긴다면 이런 일들은 피할 수 없다. 실제로 학원가의 여전한 텝스 열풍에는 ‘서울대가 텝스 점수를 4점 만점으로 반영한다’ 따위 채점 기준에 관한 소문이 큰 몫을 했다. 그에 대비해주겠다는 사교육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기란 쉽지 않다.

그렇게 ‘조건’을 챙기려면 학부모가 일찍부터 발벗고 나서야 한다. 부모의 돈과 사회적 지위 따위가 자녀에게 더 좋은 조건을 제공할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런 힘이나 시간이 없다면 불이익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개천에서 용 나기 힘들고, ‘꼴찌, 서울대 가기’가 어려워진 이유다.

이 대통령은 자신이 내놓은 여러 교육정책에 대한 국민 지지가 낮은 데 놀랐다고 한다. 국민 불신은 당연하다. 그동안의 정책이 명쾌하고 솔직·단순하지 않은 탓이다. 정부·여당 안에서도 의견이 엇갈려 결국 시늉만으로 끝난 외국어고 입시제도 개선안이 대표적이다. 답은 뻔한데 눈치를 보다 말만 복잡해졌다. 성공한 마케팅의 원칙대로 교육정책 역시 ‘단순한 것이 제일’일 수 있다. 갈 길이 분명해야 노력하기도 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괜히 섣부른 실험으로 덤빌 일이 아니라는 얘기도 된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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