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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한일합방과 한일병탄 / 김삼웅

등록 2010-01-11 19:18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4000년 역사 3000리 강토 2000만 민중이 찢기고 짓밟히고 노예로 전락한 경술국치 100돌이다. 참담했던 그해, 왕족과 대신 고위관리 대부분이 일제의 충견으로 변하고, 어느 한 나라도 동정의 눈길조차 주지 않던 아픔과 통한, 한민족 초유의 참극이었다.

대한제국을 집어삼키고 총독이 된 일왕의 충복 데라우치는 남산 총독관저에서 파티를 열고 “고바야카와, 가토, 고니시가 세상에 있다면 오늘 밤의 달을 어떻게 보았을까”라며 거드름을 피웠다. 임진왜란 때 조선 침략의 왜장들이 못 이룬 꿈을 해냈다는 오만이었다.

고려가 망할 때는 72현이 두문동에 칩거하여 절개라도 지켰지만, 조선조는 75명이 일제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일제와 전투 한번 해보지 못한 채 고스란히 외적에 나라를 빼앗겼다. 암우한 군주와 부패 교만한 지도층을 만나면 나라가 이런 꼴이 된다는 교훈이다.

독립운동가들은 ‘망국’이란 말을 함부로 입에 담지 않았다. 비록 국권을 강탈당했지만 강토와 백성은 남아 있어서 언젠가 국권회복을 믿었고 그래서 ‘국치’라 불렀다. 8월29일 국치일에는 금식을 하면서 조국 독립의 투지를 되새겼다.

공자가 재상에 취임할 때 제자가 가장 먼저 할 일을 묻자 ‘정명’을 들었다. 명실일치로 체제와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뜻이다. 신채호는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 정의했다. 우리는 국치 100돌을 맞는 오늘까지 근현대사의 역사용어 대부분을 ‘아’가 아닌 ‘비아’의 식민지배 용어를 그대로 쓰고 있다.

국치 관련 용어부터 살펴보자. ‘합방’ ‘합병’은 두 체제가 평화적으로 합의하여 새 국가를 만든다는 뜻이므로 ‘한일합방’ ‘한일합병’은 부적합하다. 일제 군경이 서울을 장악하고 3인 이상 회동을 막고 창덕궁을 포위한 상태에서 만든, 그마저 날조된 문건을 두고 합방이나 합병이라 이를 수 없다. 일제가 억지로 만든 용어 ‘한일병합’ 역시 마찬가지다. 마땅히 ‘강제병합’ 또는 무력에 의한 침탈의 ‘병탄’(倂呑)이라 써야 한다. 병탄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물건이나 국가를 강제로 빼앗아 합치는 것”을 뜻한다.

이 기회에 흔히 잘못 쓰는 역사용어 몇 가지를 살펴보자. 아직도 일부에서 ‘을사늑약’을 을사조약 심지어 을사보호조약이라 쓴다. 사인간의 계약이 자유의사에 따라야 하듯이 국가간의 조약도 마찬가지다. ‘을사조약’은 통상적 의미의 조약이 아닌 일제의 강박에 따라 맺은 ‘늑약’(勒約)이었다. 당시 신채호, 박은식은 ‘늑약’ ‘늑체’라 썼다. 올해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돌, 여전히 ‘안중근 의사의 이토 암살 사건’이라 표기한다. 안 의사는 수천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토를 쐈다. 암살이 아니라 ‘처단’한 것이다. 일본군의 한국 의병 학살을 ‘토벌’했다고 쓴다. 토벌은 정통성 있는 관군이 반란군이나 외적을 진압할 때 쓰인다. ‘비아 사관’에 바탕한 ‘식민지근대화론’ 따위도 올해는 막을 내려야 한다.

국치 100년에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가 있다. 박정희 정권이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맺을 때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선언했다. 그런데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란 표현을 한국에서는 “처음부터 무효”라 해석하지만 일본은 현재완료형으로 해석하여 “이제 무효가 됐다”는 식으로 인식한다. 여전히 식민지배를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정부의 일왕 초청은 이런 기본문제를 해결한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애국선열과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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