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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소현세자와 죽음의 추노꾼들 / 정남기

등록 2010-01-14 20:54

정남기  논설위원
정남기 논설위원
역사는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 혁신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에 의해 변화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이 항상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론 처참히 난도질돼 내팽개쳐지기도 한다.

드라마 <추노>의 배경인물 소현세자가 그랬다. 그의 죽음은 드라마의 설정처럼 아버지 인조에 의한 독살설이 유력하다. 학질에 걸려 죽었다고 발표됐지만 온몸이 검게 탔고, 일곱 구멍에서 피를 쏟았다는 기록은 독살에 의한 죽음임을 뒷받침해준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세자빈은 역모의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았고, 어린 세 아들은 제주도에 유배됐다가 둘이 사약을 받았다. 살아남은 건 네 살짜리 막내뿐이었다. 일가족 전체가 인조에 의해 처참하게 몰살됐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소현세자가 8년 동안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으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것이 죄였다. 그는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접했고, 청나라 왕족 및 고관들과 교류하면서 넓은 안목을 가진 왕세자로 성장했다. 조선을 대표하는 외교관이기도 했다. 세자빈은 살림을 챙기면서 두 나라 무역을 주도하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들의 빛나는 활약상은 <심양장계>에 그대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는 주자학의 명분론에 집착하던 조선 조정에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병자호란 때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었던 인조를 분노하게 했다.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나는 청나라가 두렵네.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조선의 아바마마와 그를 따르는 조정 대신들이야.” 어떠한 사고의 유연함도 허락하지 않았던 조선 사회에서 청나라를 배우는 것이 청을 이기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소현세자의 운명은 애초부터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현세자만이 아니다. 서계 박세당은 주자의 이론만을 고집하는 노론의 영수 송시열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사문난적으로 몰려 75살의 나이에 귀양을 떠났다가 숨진다. 진짜 이유는 형이상학에 집착하는 성리학이 아니라 실용지학을 강조했던 그의 사상 때문이었다. 그의 저작 <사변록>과 <색경>은 모두 찢기고 불태워졌다. 이 밖에도 사상적 반란을 시도했던 수많은 선비들이 그렇게 사라졌다. 중세시대 종교재판과 다름없는 사상재판이었다.

백범 김구 선생은 <나의 소원>에서 주자학을 맹신하던 조선의 선비들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통렬히 비판했다. 그는 개인 독재보다 무서운 것이 계급독재고,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라고 했다. 그에겐 주자학 이외의 어떤 사상과 학문도 용인하지 않았던 조선이 그랬고, 마르크스 사상에서 한치의 어긋남도 허용하지 않았던 공산주의가 그랬다.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서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한일합병 100년을 맞은 2010년 한국의 모습을 돌아본다.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넘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이념의 차이로 인한 대립이 격화하면서 사고의 다양성은 더욱 메말라가고 있다. 마치 세상에 두 가지 이념밖에 없는 것처럼. 한번 생각해보자. 정부 정책이란 이유로, 당론이나 언론사 논조라는 이유로 수많은 주장과 이론들을 획일화시키지는 않았는가? 조직의 이름으로 새로운 생각과 주장들을 억누르고 옭아맨 적은 없는가? 또 사상과 학문을 이분법의 잣대로 나누고 있지는 않은가?

백범의 말을 다시 한번 빌려쓰자.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않고 들판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않는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 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 들판의 풍성한 경치를 이룬다.” 대립과 갈등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꼭 한번 새겼으면 하는 말이다.


정남기 논설위원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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