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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사법부, 오만의 귀결 / 안병욱

등록 2010-01-17 21:09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한국사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한국사
사법부 과거사를 정리한 책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살펴보았다. 그러나 막상 접한 <역사 속의 사법부>라는 책의 내용은 기대했던 과거사 정리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1995년에 출판된, 그래서 과거사 반성의 의도와 무관하게 펴냈던 <법원사>보다도 오히려 퇴영적이었다.

지난날 인권침해 과거사에 책임이 있는 국가정보원, 경찰청, 국방부 등이 어려운 조건에서도 사회정의를 위해, 민주화를 위해 스스로 지난 잘못을 고백하고 반성하면서 그 내용을 정리해 책으로 펴낸 바 있다. 국가기관들이 국민의 신뢰 회복을 위해 자성의 통과의례를 거친 것이다.

사법부 또한 독재권력에 휘둘린 과거사 때문에 국민들의 시선은 곱지 못했다. 사법부 스스로도 지난날의 잘못된 재판들을 부끄러워하면서 바로잡는 문제를 거론해 왔다. 이용훈 대법원장도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되찾고 미래를 향하여 새로 출발하려면 먼저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반성하는 도덕적 용기와 자기쇄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또 2008년 9월까지도 ‘사법 60돌 기념사’를 통해 “대법원은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각종 시국사건 판결문을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그 결과는 조만간 발간될 사법부 역사자료에 포함시켜 국민에게 보고할 예정”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번에 발간된 책자는 그런 다짐이나 약속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불과 1년여 전까지도 진행되었다는 권위주의 시절의 판결문 분석이 한순간 사라진 저간의 속사정이 무엇인지 오히려 궁금해지는 것이다. 만일 작금의 시류와 무관하지 않다면 이 또한 권력에 휘둘린 새로운 과거사로 역사에 기록해야 할 사안이다.

하지만 그동안 개별 재판에서는 의미있는 변화와 중요한 성과들이 나타나고 있다. 국가기관들의 고백과 과거사위원회들의 진실규명에 따라 재심이 행해지고, 재심 재판부는 과거 판결을 뒤집으며 별도로 사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예컨대 김양기 간첩조작사건 재심 재판부는 “검사가 제출한 모든 증거들은 증거능력이 없고 신빙성이 없는데도, 최후의 인권수호기관인 법원은 최고법원에 이르기까지 5번에 걸친 재판을 거쳤음에도 결과적으로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는 피고인과 변호인들의 주장에 눈과 귀를 막은 채 공허한 증거들이 그려낸 허상만을 바라보았다”며, 재판의 형식으로 행해진 인권침해였다고 뒤늦게 반성했다.

만일 지난날에도 사법부가 법과 양심에 따라 이처럼 재판했다면, 그 많은 인권침해 사건은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때도 용기를 가지고 재판했던 여러 예외적인 사례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사법부 구성원 개개인으로는 우리나라 최고의 유능한 인적구성일지라도 집단으로서는 권력의 시녀 노릇을 면하지 못했다.

따라서 사법부 과거사는, 개별 법조인들의 책임 이전에 사법부 운영체계와 구조상의 문제다. 과거사 청산은 사법부 조직 차원의 과제인 것이다. 고뇌에 찬 반성을 하고 있는 재판관들의 의지를 수렴하기 위해서, 또 수많은 사법피해자들의 재심을 통한 피해회복이 가능하도록, 더욱이 요즘 상황에서 드러나듯 스멀스멀 되살아나고 있는 과거의 ‘악령’들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과거사 정리가 필수불가결한 과제이다.

그런데도 이번 책자는 법적 안정성이라는 미명으로 포장한, 무오류의 오만을 굳이 드러내고 있다. 그러한 오만이 사법부는 물론 국민 모두의 불행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역사의 교훈을 새겨야 할 것이다.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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