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섭 논설위원
1998년 현대자동차 파업을 속속들이 해부한 영상보고서 <밥, 꽃, 양>(2001년 작)으로 충격과 논란을 던졌던 ‘라넷’이라는 노동자 영상제작집단이 있다. 그들이 최근 <1986, 1998, 2009>라는 노동자 영상보고서를 들고 돌아왔다.(hanitv.com에서 볼 수 있다) 민주노조 운동이 본격화하기 직전인 1986년과 구조조정의 한파가 몰아친 1998년 그리고 2009년의 울산 노동현장을 다룬 작품이다.
강산이 두번은 변했을 기간이지만, 노동자의 현실은 나아진 게 없다. 쉼없이 이어지는 특근과 밤샘, 죽기만큼 싫은 아침 기상 시간, 눈을 뜨지도 못한 채 꾸역꾸역 밀어넣는 아침밥. 1986년 일을 시작했다는 노동자는 “자고 일어나면 손이 펴지지 않아 뜨거운 물에 한참 담그고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2009년의 어떤 비정규직 노동자는 “(일터에서 졸면서도) 손이 로봇처럼 자동으로 움직인다”고 말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노동자들은 ‘로봇처럼 작동하는 손’, 아무 때나 작동시켜도 돌아갈 수밖에 없는 기계다. 변한 것이 있긴 하다. 사람을 기계 부속품처럼 거리낌없이 내치는 ‘비정규직의 천국’이 도래했다. 자식에게는 똑같은 현실을 물려주기 싫어 벌이의 절반을 사교육에 쏟는다는 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이렇게 말한다. “정규직, 비정규직 차별이 없어지지 않으면 10년 뒤에도 똑같을 겁니다. 97년, 98년 사람들 이야기를 우리도 똑같이 겪어왔고, 2019년에도 똑같은 이야기 나올 겁니다.” 노조지부의 한 간부는 이렇게 말한다. “왜 비정규직을 채용하게 허용해줬는가 … 정규직, 비정규직 다 죽는 겁니다 … 왜 안 막았는지 참 의문스럽습니다.”
나빠진 것은 이뿐이 아니다. 노동자들이 피땀 흘려 만든 노동조합의 현실도 그렇다. 1998년 민주노총 위원장을 맡았던 이갑용씨는 얼마 전 <길은 복잡하지 않다>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은 1987년 현대중공업에서 노조를 만들 때부터 울산 동구청장을 하다가 물러날 때까지 20여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가 쓴 노동운동의 역사는 성공보다는 실패의 기록이다. 노조를 배반한 노조위원장들 이야기부터 민주노총이 중요한 고비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일을 망친 이야기까지, 실패가 이어진다.
이 책에서 특히 지나치기 어려운 대목은 민주노총 본부 안팎의 계파 문제다. 파업이든, 위원장 선거든, 계파의 기득권 측면에서 접근하는 현실을 이 책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폭로한다. 계파간 갈등과 대립 때문에 싸워야 할 시점에 물러선 게 한두번이 아니다. 물론 투쟁이 만능은 아니다. 대화나 협상도 필요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저자의 지적처럼 노조가 힘이 있을 때만 협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아무 힘도 없으면서 ‘협상’만 외치는 건 항복선언이나 다름없다. 이런 실패를 반복하고도 그 계파 구도는 여전히 굳건하다.
20년의 노동 역사가 말해주는 건 제 눈앞의 이익에만 매달리다가 결국 그것마저 잃었다는 사실이다. 제 일자리 지키려는 걸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는가마는, 그 결과는 모두가 위태로운 처지로 몰린 현실이다. 또 노조 간부들이 민주노총 내 주도권에 집착하는 동안 민주노총은 종이호랑이 신세로 전락했다.
이제 우리는 빈손으로 20년 전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도 절망할 여유조차 없는 이들은 희망을 찾아야 하고, 희망찾기의 출발 지점은 분명해 보인다. 내 안에서 남들의 고통을 보고, 또 그들의 고통 속에서 나를 찾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처음으로 돌아갈 때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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