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 기자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가 정권을 잡은 지 한달도 안 돼 수도를 한양(고려의 남경)으로 옮길 것을 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송도지기쇠패(송도의 땅기운이 다함)와 한양목자득국(이씨가 한양에서 나라를 얻음)의 도참설이 유행한 뒤였다. 그러나 신하들은 갖가지 핑계를 대며 천도에 반대한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판중추원사(중추원의 으뜸 벼슬) 남은이다. “신 등이 공신에 참여하여 높은 지위에 오르는 은혜를 입었사오니 새 도읍으로 옮기더라도 무엇이 부족한 점이 있겠사오며, 송경의 토지와 집은 어찌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변명에 가까운 남은의 말은 중신들이 천도에 반대한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예나 지금이나 문제는 부동산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수도권인구정책조정실 실장을 지낸 박봉환 전 동력자원부 장관은 행정수도 건설을 추진했던 박 대통령의 숨은 뜻을 이렇게 전한다. “한반도의 민족 정통성이 남한에 있는 이유는 수도가 남한에 있기 때문인데, 만에 하나 제2의 6·25가 터져 한강을 경계로 휴전이라도 하게 되면 한강 이북의 수도권 인구와 서울이 북에 들어가게 되고, 정통성이 북으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이를 걱정해 수도를 남쪽으로 옮겨놓자는 생각이었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역시 북한과의 체제 대결이었다. 속뜻이야 어쨌든 당시 ‘수도권 인구 재배치 기본 계획안’에는 행정수도 건설과 함께 반월(안산) 공단 건설, 서울대의 대학원대학화(지방국립대학의 서울대 분교화) 등 획기적인 대책이 포함돼 있었다. 가장 많이 참고했던 나라는 독일(당시 서독)이었다. 독일은 세계에서 드물게 국토의 균형발전을 이룬 나라다. 수많은 공국으로 출발한 탓도 있지만, 공간정비법(1965년) 같은 정책 대응도 뛰어났다. 세종시 수정안을 지지하는 세종시 주민들로 이뤄졌다는 독일현지방문단이 독일에서 무얼 보고 왔을지 궁금하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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