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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문화칼럼] 스마트폰은 음악을 어떻게 바꿀까 / 김작가

등록 2010-01-29 19:55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전화번호가 바뀌었다고 연락하는 사람들이 부쩍 많다. 백이면 백, 스마트폰 때문이다. 아직 스마트폰을 사지 않은 사람들도 어떻게든 사고 싶어서 안달을 내는 분위기다. 스마트폰의 핵심은 뭘까. 피시 앞에 앉지 않아도 온라인 콘텐츠를 만날 수 있다는 얘기다. 진정한 모바일 인터넷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인터넷은 일찍이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을 재편했다. 엠피3(mp3)을 비롯한 각종 음원 파일의 등장은 거대한 공룡 같았던 음반의 지위에 치명상을 입혔다. 음악을 소유하는 방식이 음반에서 음원으로 바뀌면서 ‘너 음반 몇 장 갖고 있니?’라는 물음은 ‘너 파일 몇 기가나 되니?’로 바뀌었다. 모바일 인터넷은 그런 물음을 한번 더 바꾼다. 아니, 없앤다. 소유라는 개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어떤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음원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음반의 형태건, 음원의 형태건 마찬가지다. 음반 구입과 다운로드는 그런 소유를 가능케 하는 행위다. 그러나 모바일 인터넷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언제 어디서나 스트리밍의 형태로 그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원하는 그것이 이미 온라인에 존재하며, 100%의 접근성을 갖는다. 개인의 음반진열장과 하드디스크 안에 있던 음악은 온라인으로 위치를 옮긴다. 접속하는 모든 이들에게 접근을 허용하는 장소에서 가장 공공의 것은 가장 개인의 것이 되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음악은 소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청취만을 위해서 존재한다.

이런 상황은 세계의 모든 책이 비치된 도서관에 온 것과 비슷하다. 내 책은 아니지만 모든 책을 읽을 수 있는 도서관. 이 도서관에서 우리는 먼저 읽고 싶었던 책을 읽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읽을 만한 책을 찾아 서가를 뒤지게 될 것이다. 한 권 한 권 훑으면서 내용을 파악할 수도 있겠지만, 도서 정보 시스템이나 가이드의 도움을 받는 게 효과적으로 책을 고를 수 있는 방법임은 당연하다. 모바일 시대의 음악도 그렇다.

모든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정보의 홍수를 맞이한다는 의미다. 지금보다 더욱 넓게 펼쳐질 음악의 바다에서 필요한 건 나침반이다. 유행가가 아닌 다른 음악을 듣고 싶을 때, 자신의 취향에 맞는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 음반의 시대에 그런 몫을 한 건 라디오였다. 다운로드의 시대에 이르러 웹진이나 음원 사이트들이 더해졌다. 모바일 시대에는 어떨까. 몇 가지 상상이 가능하다. 원하는 음악의 분위기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 몇 개를 입력하면 그에 맞는 음악들이 스트리밍으로 제공된다거나, 혹은 어떤 노래가 마음에 들었을 때 유사한 분위기의 음악들을 함께 들어볼 수 있는 서비스가 마련된다면 어떨까. 홍보와 마케팅에서 음악은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큰 수고를 하지 않고도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이 구축된다는 얘기다. 여기에 들은 음악들을 바탕으로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이들을 확인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가 생긴다면? 음악을 통한 소셜 네트워킹은 더욱 간편해진다. 기술의 발전은 문화를 바꾼다. 토머스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한 이래, 음악은 음원을 담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모바일은 어떤 음악을 탄생하게 할까. 머지않은 미래가 기다려진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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