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기 논설위원
외환위기를 빠져나왔을 때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런 위기가 다시는 없을 거라고. 하지만 불과 11년 만에 금융위기가 몰아닥쳤다. 한때 2600억달러가 넘는 외환보유액이 있었지만 급속하게 빠져나가는 달러와 치솟는 환율을 잡을 수 없었다.
여러 이유를 댈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의 방심, 금융권의 과도한 팽창, 어쩔 수 없는 전세계적 위기. 모두 맞는 말이다. 하지만 두차례 고비를 넘기면서 분명해진 것이 있다. 금융시장을 개방한 이상 국제적인 금융위기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미국, 영국을 보자. 이들은 20세기 들어서만 수십 차례의 금융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사태 재발을 막지 못했다. 10여년마다 위기는 되풀이되고 있다. 금융위기는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존재다.
최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렸던 세계경제포럼(WEF)의 초점은 금융위기 재발을 막기 위한 새로운 금융규제 방안이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은행 규모의 확장을 억제하고 위험도 높은 투자를 금지하는 내용의 금융개혁안을 발표했다.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엄격하게 분리한 1999년 이전 글래스-스티걸법으로의 사실상 복귀다.
우리 정부도 지난 3일 위기 이후 금융산업 재도약을 위한 세미나를 열었다. 하지만 내용은 전혀 딴판이다. 금융규제를 더 풀어서 금융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취지다. 진동수 금융위원장은 “금융 국제화를 통해 아시아 금융리더로 도약해야 한다”고 했다.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은 초등학교 수준에서 중학생 수준으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참 답답하고 공허한 소리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금융은 영국, 미국처럼 오랜 기간 산업자본의 축적이 이뤄진 뒤에야 꽃을 피우는 법이다. 또 금융은 규모가 커질수록 위험도 함께 커진다. 스위스 최대 은행 유비에스는 금융위기로 400억달러를 손실 처리했다. 그만한 손실을 감당할 준비가 돼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두바이나 아이슬란드처럼 신기루일 뿐이다.
더 심각한 것은 정부가 금융감독과 관치금융조차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금융시스템 붕괴를 막고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기 위한 규제와 감독은 더 강화해야 한다. 이는 시스템의 안정성을 높이면서 경쟁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다. 금융과 산업의 분리, 일반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 등이 그런 것들이다.
하지만 정부는 사전 규제 완화라는 명분으로 금융시스템 안정을 위한 규제는 풀고 사후 모니터링 강화란 이유로 관치금융이 개입할 여지는 오히려 넓혀 놓았다. 말로는 시장경제를 외치면서 뒤에선 관치금융으로 하겠다는 뜻이다. 케이비금융 사태만 해도 그렇다. 운전기사의 행적을 낱낱이 조사하고 계좌추적권까지 발동해 강정원 국민은행장과 이사진의 개인 비리를 찾는 데 혈안이 돼 있다. 정말 낯뜨거운 일이다. 관료 출신을 지주회사 회장에 앉히려다 실패하니까 손보기에 나선 것 아닌가?
다시 경제위기가 발생한다면 진원지는 중국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자산거품은 언젠가 꺼지게 돼 있다. 중국 기업들의 실적도 마찬가지다. 중국발 경제위기의 충격파는 외환위기의 몇 배에 이를 것이다. 중국에 대한 무역의존도가 이미 20.5%까지 올랐다. 한번 터지면 국내 금융과 실물이 동시에 마비될 수 있다.
정부가 지금 할 일은 미래의 위기에 대비하는 일이다. 그나마 금융위기를 잘 넘긴 것은 외환위기 이후 기업과 은행이 무리한 외형 확장을 하지 않고 내실을 다졌기 때문이다. 그런 나라만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다. 정부가 정말로 금융산업 선진화를 바란다면 새로운 불씨가 될 수 있는 규제완화 발상을 접고, 관치금융의 못된 습관부터 고쳐가는 게 순서일 것이다. 정남기 논설위원jnamki@hani.co.kr
정부가 지금 할 일은 미래의 위기에 대비하는 일이다. 그나마 금융위기를 잘 넘긴 것은 외환위기 이후 기업과 은행이 무리한 외형 확장을 하지 않고 내실을 다졌기 때문이다. 그런 나라만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다. 정부가 정말로 금융산업 선진화를 바란다면 새로운 불씨가 될 수 있는 규제완화 발상을 접고, 관치금융의 못된 습관부터 고쳐가는 게 순서일 것이다. 정남기 논설위원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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