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순 대기자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문학관은 나가사키시에서 사세보 방향으로 가다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 나가사키와 직접 인연이 없는 그가 1996년에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 이곳에 문학관이 세워진 것은 대표작의 하나인 <침묵>의 작품 세계와 연관이 있다. 천주교 신앙을 엄히 금하고 있는 에도 막부 때 포교활동을 벌이던 젊은 포르투갈인 신부의 고뇌를 그린 소설이다. 일본 최초의 가톨릭 순교자 26인이 처형된 곳도 나가사키다.
나가사키는 또한 피폭도시라는 슬픈 역사를 안고 있다. 도시가 산지로 둘러싸여 그나마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위력은 티엔티 1만5000t으로 약 14만명이 희생됐다. 나가사키 상공 500m에서 터진 플루토늄형 원폭은 히로시마에 비해 폭발력이 1.5배였으나 희생자는 절반 수준이었다.
지난달 하순 일제 강점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취재하느라 나가사키에 들렀다. 출발하기 전 인터넷으로 나가사키역에서 걸어서 찾아갈 수 있는 비즈니스호텔을 찾다가 아파호텔을 찍었다. 현지에 도착해 숙박 절차를 마치고 방에 들어가니 <보도되지 않은 근현대사>라는 이상한 제목의 책이 있었다. 일어와 영어 번역문을 대비시킨 것도 있었는데 어디선가 들어봤던 ‘다모가미’란 이름이 있었다. 다모가미? 불쑥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2008년 항공막료장으로 재직하던 중 일본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글을 발표했다가 잘린 사람이다.
사정을 알아보니 호텔 사업부문을 포함한 아파그룹의 소유자는 모토야 도시오라는 보수적 재계인이다. 그의 저서 <보도되지 않은 근현대사>는 방위나 역사교육 문제에서 극우적 논조를 펴는 산케이신문사에서 출판됐다. 그가 주최한 ‘참된 근현대사관’ 논문 현상공모에서 최우수상으로 처음 선정된 것이 다모가미의 ‘일본은 침략국가였나’였다. 모토야는 해마다 정·재계 인사와 자위대 현직 간부들을 초청해 ‘일본을 말하는 와인모임’도 주선한다. 순교와 피폭의 도시 나가사키에서 극우적 주장을 펴는 책이 비치돼 있는 호텔에 투숙하게 될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가사키는 피폭도시라고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만큼 평화로운 도시는 아니다. 올해 들어 일본 공영방송 <엔에치케이>(NHK)에서 대하드라마를 방영하면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는 역사적 인물이 사카모토 료마다. 도사번(지금의 고치현)의 하급 무사였던 사카모토는 적대관계에 있던 사쓰마(가고시마)와 조슈(야마구치)의 동맹을 주선해 메이지 유신의 산파역으로 평가받는다. 사카모토와 동향 출신으로 한 살 연상이었던 또 하나의 인물이 미쓰비시재벌의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였다. 막부 말기 나가사키에 와 외국 교역을 담당했던 이와사키는 메이지 유신의 실세들과 친분을 쌓아 조선·광업 등 여러 분야에 사업을 확장해갔다.
미쓰비시재벌은 일제의 전쟁 수행에 앞장섰다. 태평양전쟁 초기 일본이 세계 최고 수준의 전투기라고 자랑했던 제로센 함상전투기는 미쓰비시중공업의 항공기 분야에서 생산됐다. 중공업 산하 나가사키조선소에서는 거함 무사시를 비롯해 수많은 함정이 진수됐다. 지금도 최신형 이지스급 함정이 이곳에서 속속 건조되고 있다. 일제 때 미쓰비시재벌이 운영하던 조선소나 외딴섬의 해저탄광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끌려와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일본의 옛 재벌 가운데 미쓰비시계열만큼 불행했던 과거사를 은폐하고 진상조사에 대한 협조를 거부하는 데도 찾기 힘들다. 붉은 다이아몬드 3개로 이뤄진 미쓰비시 로고는 나가사키조선소의 거대한 크레인에서 오늘도 빛을 발하고 있다.
김효순 대기자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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