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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당신의 거부권 / 여현호

등록 2010-02-18 21:39

여현호 논설위원
여현호 논설위원




세종시 문제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가장 최근 입장은 “당이 중심이 돼서 결론을 내리면 된다”는 것이다. 당에 맡기고 자신은 발을 빼겠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한나라당에 대한 재촉의 뜻이 더 강해 보인다. 앞뒤 정황을 엮어보면, 정운찬 총리로는 더는 안되겠으니 당이 책임지고 세종시 수정안을 당론으로 확정하라는 말이겠다. “당론을 만들어야 한다”거나 “토론을 해서 결론이 나면 따라가야 한다”고 강조하는 데선 감정의 격동도 느껴진다. 수정안 관철을 맡긴 정 총리가 성에 안 차자 직접 나섰다가 ‘집안의 강도 아니냐’는 역공을 받은 분함, 당은 도대체 뭐 하느냐는 역정, 어떻게든 절차를 밟아 박근혜 전 대표 쪽을 굴복시키겠다는 오기 따위다.

대통령의 말이 떨어지자 한나라당 친이명박계는 수정안 관철을 위한 토론과 표결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의 ‘토론과 표결’이 묘하다. 친이계 핵심 의원 한 사람은 세종시 수정안을 ‘기존 당론의 변경이 아닌 새 당론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실세 의원도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찬성한 2005년 한나라당 당론은 결함이 있어 “당론으로 볼 수 없다”며 그런 주장에 동조했다. 이런 말들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나라당 당헌상 당론 변경에는 재적의원 169명의 3분의 2인 113명의 찬성이 있어야 하지만, 새 당론 채택은 재적 과반인 85명이 출석해 그 절반인 43명의 찬성만으로도 가능하다. 그리되면 친박 세력 없어도 수정안을 당론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

꼼수다. 그런 말을 하려면 애초 세종시 수정법안을 낼 게 아니라 기존 법을 폐기하고 대체입법부터 했어야 한다. 그런 억지논리까지 동원할 정도라면 수정안 관철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친박계나 중립 성향 의원들에게 ‘힘이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야당과의 대결뿐 아니라 제 집안에서까지 그렇게 억지를 부리겠다면 갈 데까지 다 간 셈이다. 어떻게든 형식만 맞추면 된다는 식이니, ‘이명박식 법치주의’와 닮은꼴이기도 하다. “당에서 정해지면 따라가야 민주주의”라는 이 대통령의 민주주의론의 실상이 바로 이렇다.

한나라당의 지금 모습을 정상적인 ‘토론’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또 있다. 친이 쪽 희망대로 세종시 수정안을 강제로라도 당론으로 채택하면 원안 사수를 주장했던 박 전 대표는 정치적으로 치명타를 입게 된다. 지금 상황은 박 전 대표에게 세종시 수정 수용과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가운데 택일을 강요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반대로 수정안이 관철되지 못하면 이 대통령도 권력 누수를 각오해야 한다. 어느 쪽이든 걸려 있는 게 너무 크다. 그렇게 걸려 있는 게 많으면 “설명이 이뤄지고, 비판이 이뤄지고, 수정이 있으며, 다시 시비 구별이 있어도 성내지 않는” ‘현자의 토론’은 불가능하다. ‘저놈을 벌주라’는 왕자의 완력, 생사를 건 권력투쟁만 남을 뿐이다.

민주주의가 왕정이나 독재와 다른 것은 여러 집단이나 개인이 찬반의 발언을 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 사회도 민주화와 산업화를 통해 아니오라고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집단들을 형성해냈다. 곧, 정상적인 민주정치, 시민사회의 모습이다. 따지자면 박 전 대표도 권력 내부의 ‘거부권 행사자’다. 지금처럼 전교조·민주노총·민주노동당 등을 부인하고 몰아붙이는 배제의 논리가 급기야 내부의 거부권 행사자까지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이어진다면 이미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 끝이 어디까지 이어지겠는가. 여권의 세종시 논란을 개인화된 권력의 누추한 모습이라고 비웃거나, 강 건너 불구경하듯 즐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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