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제성 변호사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기 5년 전인 1984년의 동독을 배경으로 한 <타인의 삶>이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은 혐의를 부인하는 피의자는 혐의를 시인할 때까지 심문해야 한다는 투철한 신념을 지닌 동독 비밀경찰(슈타지) 요원이다. 주인공은 누군가가 국가로부터 혐의를 추궁당할 때에는 무언가 잘못을 했기 때문이고 강하게 부인할수록 범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믿는다. 참으로 섬뜩한 신념이다. 주인공은 문화부 장관(그 이름이 유인촌은 물론 아니다)에 의해 반정부 인사로 낙인찍힌 예술가 부부를 감시할 임무를 띠고 24시간 그 부부의 집을 도청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도청을 통해 예술가 부부의 일상을 알면 알수록 점점 더 그들에게 공감하게 되고 그들이 하려는 일이 결코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자신이 미처 몰랐던 정부의 거짓과 위선을 깨닫고는 그들의 반정부 활동의 증거를 숨겨주고 은밀히 도와주기까지 한다. 현실에서는 어떨까? 25년도 지난 영화 속 시대적 풍경이 그다지 낯설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첨단장비 덕택에 감청은 더욱 교묘해졌고 감청으로 취득하는 정보의 양도 매우 방대해졌다. 감청 대상자의 사무실이나 집에서 이용하는 인터넷 회선을 통째로 감청하는 이른바 패킷감청도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다. 감청기간이 지나치게 긴데다가 무제한적으로 연장할 수 있다. 국가안보를 목적으로 한 감청은 요건이 지나치게 느슨하다. 심지어는 법원의 사전허가 없는 긴급감청도 허용된다. 인터넷 가입자의 인적사항은 사전이건 사후건 법원의 허가 자체가 필요 없다. 게다가 감청 사실이 대상자에게 제대로 통지되지도 않는다. 가히 감청의 천국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영화에서처럼 감청을 행하는 자가 감청 대상자에게 감명하여 생각이 바뀌고 오히려 감청 대상자의 수호천사로 변신하는 일은 아마도 현실에서는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우리 헌법 제18조는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정보통신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통신의 비밀 보장은 특히 중요하다. 그래서 통신의 비밀을 강제로 취득하기 위해서는 특정 중대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경우에 한해 법관으로부터 영장을 발부받아 적법한 절차에 따라야만 한다고 우리의 통신비밀보호법(이하 통비법)이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을 따라가지는 못하는 입법적 지체현상, 법의 빈틈을 교묘하게 활용하는 정보·수사기관의 편법적 행태, 그리고 이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사법부의 무능과 무관심이 어우러져 통비법은 통신의 비밀을 ‘보장’하는 법이 아니라 통신의 비밀을 손쉽게 ‘취득’하는 법으로 전락하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와 여당은 감청을 더욱 광범위하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하려는 통비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민노당의 이정희 의원이 이런 통비법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통비법 전면 개정안을 제출하였다. 개정안은 감청허가 대상범죄 축소, 감청 허가요건 강화, 감청기간과 감청 연장 횟수 제한 등 통신의 비밀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개선책을 마련하고 있다. 아울러 감청한 기록의 사본을 법원에 제출·보관토록 함으로써 밀실에서 무제한 생성·파기되던 감청 기록을 공식적으로 관리하도록 하고 국회에 정기적으로 감청과 관련한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이메일 압수수색에 대한 특례를 두어 무차별적인 압수수색을 제한하고 있다. 모두 진작 개정됐어야 하는 내용들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번 기회에 통비법이 진정 통신의 비밀을 보장하기 위한 법으로 제자리를 찾기를 바란다. 류제성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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