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 그렇게 기다려도 오지 않던 임인데 … 뭐라고 부르리까 먼 데서 오신 손님.’ 1970년대 초, 이 노래는 텔레비전에서 늘 흘러나와 민망하게도 초등학생이던 내 귀에조차 익숙한 인기가요였다. 이 노래가 민망한 것은, 가사에서 적시되지만 않았지 분명 성매매를 연상시키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성매매는 불법이었으나 이런 노래는 버젓이 나왔다. 만약 이 시절에 젊은 연인들이 대낮에 길거리에서 단체 키스 해프닝을 벌였다면, 세상이 망조라고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이때는 치마가 무릎 위 17㎝보다 짧은 것을 허용하지 못하던 때였으니까.
그런데 합리적이고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사랑하는 남녀의 키스나 미니스커트와 성매매 중 무엇이 더 문제일까? 인권, 법, 풍속, 어느 측면으로 보더라도 범죄인 성매매가 더 큰 문제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당시 어른들과 여론은 젊은이들의 노출이나 성적 표현에 비해 성매매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최근 일부 중학생들의 과격한 졸업식 뒤풀이에 대한 여론을 살펴보면 이런 문제점이 보인다. 이 사건 초반에 여론은 옷을 찢거나 벗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양 보도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런 짓을 저지른다는 것에 어른들은 혀를 찼다.
하지만 원래 축제란 속성 자체가 그렇다. 축제의 핵심은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고 무질서, 난장이다. 양주별산대놀이의 대사는 욕설 천지이고 낯 뜨거운 음란장면이 다수 등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힘든 일이 끝난 직후의 축제는 난장과 일탈이 허용되는 숨쉴 공간이었다. 젊음이 끓는 10대 중반, 입시 부담도 없는 중학교 졸업식에서, 학교라는 억압적 굴레를 상징하는 교복을 찢는다는 것 역시 그런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난장과 무질서, 그것이야말로 축제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알몸, 일탈, 무질서, 난장, 이런 것이 아니다. 진정 이것을 원한다면 적당한 곳에서 그런 축제를 하도록 해주면 된다. 진짜 문제는 간간이 나타나는 강제성과 폭력이다. 그 뒤풀이가 강제와 폭력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고 졸업생들이 즐겁지 않다면, 그것은 폭력일 뿐 축제가 아니다. 뒤늦게나마 경찰이 폭력 혐의로 수사에 착수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우리는 좀더 생각해 봐야 한다. 왜 우리는 축제가 될 기회를 폭력으로 뒤범벅할까.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폭력적인 음주 강요와 얼차려나, 중학생들의 알몸 뒤풀이나 본질은 같다. 시작과 끝, 가장 중요한 축제가 즐거움이 아니라 폭력으로 인한 고통으로 채워진다는 것은, 그들이 내면에 지닌 사회상, 인간과 세상에 대한 태도, 더 나아가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일상을 벗어나 상대방에게 고통을 줌으로써만 자신과 그가 동일집단 성원임을 확인한다는 것은 얼마나 불건강한가.
찢거나 때리는 폭력적이고 과격한 일탈과 전복을 막으려면, 좀더 부드럽고 온건한 일탈과 무질서로도 만족할 수 있도록 일상이 덜 억압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런 뒤풀이가 지닌 폭력성보다 알몸과 난장에 더 화들짝 놀라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야말로, 사회적 폭력과 억압을 지속시킨다는 점에서 정말 우려할 만한 지점인 것이다.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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