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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작가들의 자존심 / 박범신

등록 2010-02-26 19:04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작가에겐 빵보다도 자존심이 중요하다. 문학 가치의 본질은 독자성에 있고, 독자성을 지켜가려면 ‘자존’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훼손당하지 않은 자기존재의 눈으로 세계를 독자적으로 보도록 운명지워진 사람이며, 그것을 통해 세계의 구조적 모순과 허위를 까발릴 권리를 부여받은 사람이고, 최종적으로는 그가 속한 부조리한 세계를 넘어, 좀더 깊고 완전한 세계를 꿈꾸도록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의 부정(否定)은 그러므로 그의 존재 이유이며, 그를 통해 그는 아프게 부정한 세계 너머의 새로운 이상에 대해 말함으로써, 마지막엔 좀더 깊고 높은 생산성을 담보하게 된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작가의 ‘자존’은 그 사회의 풍향계와 같아서 그것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란 전제주의거나, 아니면 새로운 세계에의 꿈과 희망이 사라진 사회라는 것이다.

최근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한 문학단체에 요구한 ‘확인서’를 보면, 우리가 다시 전근대로 되돌아가자는 건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확인서엔 ‘본 단체는 광우병국민대책회의에 소속되었으나 실제 불법 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향후 불법 폭력 시위 사실이 확인될 경우 보조금 반환은 물론 관련된 일체의 책임을 지겠습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한마디로 ‘말을 안 들으면 돈을 주지 않겠으며 이미 지원한 돈도 반환하라’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치사하고 참담한 확인서를 요구할 생각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묻고 싶다. ‘예술위’는 ‘예술이 우리 모두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으로 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사업과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모든 이가 창조의 기쁨을 공유하고 가치있는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설립된 기관이다. 작가들의 비판적 사유를 보호하고 창조적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도와야 할 의무가 바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있다. 그런데 저들이 앞장서서 작가들에게 ‘돈 몇푼’을 앞세워 굴욕을 강요하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설립 목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예술위’의 독자적인 발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왜 하필 뒤늦게 ‘광우병’으로 뒤통수를 치는가. 예술인을 오히려 보호하고 예술창작을 지원해야 할 ‘예술위’가 ‘광우병’과 ‘촛불’을 앞세워 예술문화단체를 ‘돈’으로 압박하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비탄을 넘어 정말 참담하고 ‘쪽팔려’ 죽을 지경이다. 잘못된 세계의 부정을 통해 그 너머의 이상과 꿈에 대해 말하도록 운명지워진 작가로서 사회적 이슈에 대해 ‘발언’을 보태는 것은 참으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빛과 소금이 될 터이다. ‘광우병국민대책회의’엔 약 1800여 시민단체가 소속되어 있다. 확인서를 강요받고 있는 문학단체는 내가 아는바, ‘불법 폭력 시위’를 주도한 적이 없고 주도적인 단체도 아니다.

다시 지적하거니와, 작가에겐 빵보다 자존이 중요하다. 자존에 근거하지 않은 문장이란 노예의 목소리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유롭게 ‘말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확인서를 강요해도 그들의 ‘말’은 막지 못할 게 뻔하다. 앞으로는 작가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은 온 국민에게 재갈을 물리려는 짓과 다름없다는 ‘말’을 보태야겠지. 작가들까지 ‘돈’으로 길들이고 나면 ‘태평성대’가 될 것이라고 혹시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무지한 바보이거나 전제주의에 대한 병든 숭배자일 것이다. 더 나은 세계를 꿈꾸는가. 누구보다 작가들이 그렇다. 작가들의 문장과 발언이 지향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더 나은 ‘인간주의’ 혹은 ‘사랑’이라고 나는 감히 믿는다.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열망이 없다면 기실 단 한 문장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박범신 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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