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본영 법조팀장
정치사적으로 극적인 사건들에는 숙명처럼 배신이 따라붙는 경우가 많았다. 이상이 빛날수록 위선과 배신도 컸다. 지난 세기에 세계를 흔든 여러 사회혁명의 결말들이 그렇다. 선동과 과장, 연극적 요소들이 개입하기 마련인 격동기 정치행위들의 속성이 이런 혼란의 배경에 있을 것이다. 커다란 배신행위들은 그래도 인간사회의 속성에 대한 성찰의 기회와 함께, 또다른 약속에게 다시 배신당할지 모르는 미래를 남겨놓았다. 헌법재판소는 1987년 6월항쟁의 성과물로 일컬어진다. “국민 여러분의 민주화 열망을 모아” 그 이듬해 창립됐다고 헌재는 밝히고 있다. 출발점에서부터 민주공화국의 형식적 틀만은 두루 갖춘 대한민국에서 40여년 만에 한 헌법기관이 새로 태어난 것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헌재 덕택에 시민들은 헌법에 열거된 기본권 한두 가지쯤은 읊게 됐다. 헌법이 유린당한 기간이 그렇지 않은 기간보다 긴 한국에서는 작지 않은 변화다. 하지만 쏟은 비용과 관심에 모자라지 않게 헌재가 ‘순이익’을 내는 기관인지는 자신하기 어렵다. 정치권력의 위헌적 행사를 제어해온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법률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실질적 평등을 추구하는 시도는 쳐내는 일도 했다. 최근의 사형제 합헌 선고는 작은 예시다. 1996년에는 7 대 2였던 합헌과 위헌 의견이 이번에 5 대 4로 바뀐 데서 의미를 찾기도 하지만, 세계적 조류와 동떨어진 합헌 의견이 아직 대세라는 데 방점이 찍힌다. 택지소유상한제, 토지초과이득세, 종합부동산세 등 경제문제에서는 시종 기득권에 충실한 결정을 내왔다. 특히 지난해 언론관련법 사건에 대한 ‘레드카드는 내밀지만 퇴장은 안 시킨다’는 식의 기묘한 결정은 스스로를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신행정수도특별법 헌법소원 사건에서 대한민국의 법통이 조선과 이어진다며 왕실복고론자나 반길 괴이한 논리를 편 것은 길이 회자될 일이다. 영향력은 커졌지만 권위에는 상처를 입고 있는 헌재는 스스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헌법재판이라는 전인미답의 땅을 개척하기 위해 초기에는 경험 많은 판사들이 요긴했을 것이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나도록 헌법재판관 자리가 대법관 지명을 꿈꾸는 고위직 판사들에게 대체재로 인식되는 상황을 벗어나지 못했다. 헌재가 강력한 권위를 부러워할 법한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재판관 16명 중 8명만이 직업법관 출신이다. 한국 헌재의 현주소가 이러니 대법원과의 통합 주장까지 나온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은 얼 워런을 보수적 가치에 충실한 사람으로 믿고 연방대법원장으로 앉혔다. 워런이 기대와는 다른 색깔을 뚜렷하게 드러내자,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아이젠하워는 “내가 저지른 가장 중대하고 어리석은 실수”라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 때 연방대법관이 된 데이비드 수터도 역시 공화당의 기대를 저버리고 중도 내지 자유주의 지대로 넘어갔다. 그것도 모자라 아들 부시와 앨 고어의 대선전에서 플로리다주의 재검표를 중단시키는 다수의견 편에 서지 않자, 공화당 쪽에서는 “배신자”라는 비난이 나왔다. 배신 자체는 좋지 않은 것이지만, 임명권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법치주의와 사법 독립이라는 가치에 충실했던 이들의 처신은 칭송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헌재는 배신하지 말아야 할 것과 배신해도 될 것은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게 어떨까 싶다. 시민들 사이에서 ‘우리에게 헌재가 굳이 필요한 존재였나’라는 불평이 더 많이 쏟아지기 전에. 이본영 법조팀장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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