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호 신부
생활사를 옮기느라 이삿짐을 날랐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 시대를 맞아 도시를 찾아든 세대들에게는 누구 할 것 없이 이삿짐 꾸리는 데 익숙해 있다. 이사할 때는 으레 친구가 도와주러 왔고 휴일이면 이삿짐 차량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용달차 짐칸에 쪼그리고 바람을 맞으며 가는 것도, 가구를 정리해 놓고 자장면을 먹는 것도 즐거웠다. 방 한 칸에서 두 칸으로, 월세에서 전세로 그렇게 옮겨다니던 시절의 행복감이 지금보다는 더 좋았다는 생각도 든다. 신학교에서는 학기마다 방을 옮기고 룸메이트가 바뀌는 생활이었다. 사제로 본당 사목을 하면서는 적어도 2년에 한 번, 혹은 4~5년에 한 번 옮겨다녀야 해서 이삿짐 싸는 데는 이골이 나 있다. 팔자로 여길 수밖에 없다. 단순한 것이 최고다. 수도자들은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소임지를 찾아간다. ‘신부님 이삿짐은 온통 책 박스뿐이더라’ 하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물정이 개벽되어 버렸다. 사제들의 이삿짐도 컴퓨터는 기본이고 건강 취미생활 기구 등 각가지 용도의 의복이나 생활용품들이 늘어난다. 짐을 꾸릴 때마다 정리한다고 하지만 늘어나는 짐들은 어쩔 수 없다. 방을 옮기면서 보니 박혀 있던 짐들이 어찌나 많은지 놀랐다. 필요해서 구입한 것, 누군가에게 받은 것, 언제부터 왜 와 있는지도 모르는 것, 일 년에 한 번 사용할까 말까 한 이불 옷가지, 서랍 가득한 각종 약품, 기념 성물, 무수한 리드선 플러그들…. 혼자 사는 자의 짐이 이렇게도 많으니 자녀들과 생활을 하는 가정은 어떻겠는가. 의복이나 운동기구가 차지하는 별도의 방이 이제는 기본이 되었다. 더 넓은 평수의 거실과 방, 가구, 액세서리와 장난감, 신발장, 커지는 냉장고, 승용차… 차지 공간은 계속 늘어나야 한다. 땅과 집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생활 몸집이 공룡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필요 없는 물건을 구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꼭 필요한가의 문제는 여전하다. 마케팅 홍보물은 신제품 구입을 교묘하게 속삭인다. 거절한다면 문화인도 아니고, 정보력에 낙오될 것이라 협박한다. 구입에 수고할 필요도 없다. 결심만 하면 이튿날 배달된다. 세일, 경품, 포인트, 공짜폰 어쩌구 하지만 공짜는 절대 없다. 구입에서 폐기되기까지 수명도 짧다. 공해 문제다. 지출을 감당하려 가족들이 돈벌이 용병에 자원한다. 아이들은 학원, 유아원에 맡겨진다. 우리 공동체는 생태적 삶을 당연히 지향한다. 마을의 난방은 주로 연탄과 심야전력이다. 연탄보일러도 전기모터를 사용한다. 정전이라도 된다면 과열로 위험하다. 대부분 중요 농기계가 동력이다. 생활 에너지원 자체가 공해 배출을 피할 수 없는 구조의 생활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기 문명과 결코 결별할 수 없는 볼모의 삶이다. 강제가 아닌 자발적이어서 완벽한 종속 관계이다. 기업이나 정책자들이 웬만한 환경문제 논란에 눈도 까닥하지 않는 이유다. 현대가 대면하는 가장 심각한 딜레마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이 소비하면서 도덕적 비난도 함께 하니 말이다. 마치 정부 정책은 비난하면서 투표로는 그 정당을 지지하는 이상한 나라의 국민들처럼 말이다. 대안은 하나밖에 없다. 문화생활에 대한 저항이다. 가족이 모여 정화결사를 선포해 보자. 먼저 집 안에 있는 전기 플러그 숫자 세어보기, 가전제품들의 전력 총량 합산하기, 일년 이상 입지 않았던 옷가지와 용품을 가려 보자. 그리고 과감히 정리하면 어떨까. 아예 삶터를 옮기기로 합의하는 건 안 될까? 하늘도 계절을 착각했는지 아직도 눈이 내리네. 박기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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