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 전 통일부장관
지난주 도쿄에서 열린 한반도평화포럼과 일본 지식인들과의 대화 모임에 참석했다. 많은 얘기 가운데 아직도 머리에 맴도는 것은 한·미·일 3국 모두 북핵문제를 진전시킬 내적 계기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이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건 지금 북한 핵문제에 대한 한·미·일의 정책 동력이 크게 떨어져 있는 것은 분명하다. 유엔의 대북제재도 간간이 북한의 무기 수출을 차단하는 등 효과를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북-중 경제관계의 활성화로 인해서 이미 무력화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바마 정부는 과거 부시 때보다 합리적인 외교자세를 보이고는 있으나, 국내정치적 사정으로 인하여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주도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이를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라고 포장하기도 하나 대북정책의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졌다는 표시이다. 전통적으로 북핵문제에서 미국의 정책서클이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이 되면 이를 보완해온 것이 한국이었으나, 이명박 정부 아래서 한국 외교는 6자회담을 촉진할 수 있는 영향력도, 전략적 지혜도, 대북 지렛대도 모두 상실한 상태로 보인다. 일본 외교는 납치문제의 질곡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6자회담을 재개하기 위해서 가장 부지런히 움직이는 나라는 중국이다. 미국이 북핵문제를 중국에 아웃소싱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들린다. 말이 좋아 “내적 계기를 찾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미국의 북핵 정책이 “그럭저럭 끌고 가기”(muddling through) 상태로 접어든 느낌이다. 그렇다면 이 “그럭저럭 끌고 가기”의 끝은 무엇일까? 만약 미국의 속내가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하고 대신에 외부유출을 막는 비확산 쪽으로 돌아서는 것이라면, 이 정책은 유용성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과 일본이 공식적으로 핵을 가진 북한과 대면해야 함을 뜻하므로 그 충격과 혼란, 파장은 엄청날 것이다. 반면, 미국의 정책 목표가 여전히 북한의 비핵화에 있다면 “그럭저럭 끌고 가기”는 매우 위험한 정책이다. 지금처럼 소강상태나 교착국면이 장기화하면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경제적 존립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판을 확보했다고 판단하는 시점에서 핵보유를 기정사실화하고 비핵화를 거부하는 상황으로 나갈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북한에 대해 체제 붕괴를 불사한 전면적인 압박과 제재를 가하려 하겠지만 중국은 이 대열에 동참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 이유는 서방과 중국 모두 북한이 덜 위협적인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데는 공통의 이해를 갖고 있지만, 바람직한 북한의 미래상에 대한 이미지는 다르기 때문이다. 서방은 암묵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전환되는 북한의 미래를 그리겠지만, 중국은 북한이 공산당 독재 아래서 성공적으로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는 이웃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이 차이가 전면적 대북압박과 북한의 핵보유 인정 중 양자택일의 순간에 중국이 서방과 다른 선택을 하도록 할 것이다. 중국이 북한의 존립이 부정되고, 자신의 국경 동쪽 정세가 극도로 불안정해지는 것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사태가 발생하면 북핵문제는 중국과 한·미·일의 새로운 갈등전선을 형성하는 쪽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결국 미국은 중국이 이런 극단적인 선택의 기로로 몰려가기 전에 핵문제를 진전시켜야 한다. 북핵문제를 “지금만 피해보자”는 식으로 “그럭저럭 끌어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6자회담이 재개되더라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중국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반대하는 공통의 이해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한반도 정책의 당면목표로 공유하고 있을 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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