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현호 논설위원
지난 일주일 사이 일본을 방문해 기업인, 정부 당국자, 정치인, 학자, 언론인 등을 두루 만날 기회가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한국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밴쿠버 겨울올림픽 결과만 두고 그러는 게 아니라, 한국 기업의 성장과 빠른 경제회복을 두고 하는 찬탄이었다. 일본인의 ‘혼네’(속마음)와 ‘다테마에’(겉표현)는 다르다지만 이번엔 꼭 인사치레만도 아니었다. 한국이 여러 부문에서 일본을 바싹 뒤쫓고 있는데 일본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라는 위기감이 깔려 있었다. 한 언론인은 “한국의 질주에 대한 놀라움과 경이로움, 그리고 두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곧 한국의 경제·산업 조사를 전담할 한국실을 신설하기로 한 것은 ‘한국 배우기’가 말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증거다. 원자력발전소·상하수도·고속철도 등 사회간접자본(SOC)의 개발도상국 수출을 전략산업으로 삼겠다거나, 총리와 대신들이 직접 해외 수주에 나서겠다는 것도 한국의 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주의 충격 때문일 것이다. 이쯤 되면 우쭐할 만할까? 그렇진 않아 보인다. 일본이 한국에서 배우겠다는 것은 ‘눈높이’를 낮추는 방법이다. 한 대학교수는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는 코치와 스태프도 달랐지만, 일본스럽게 고급 기술만 추구한 것과 국제적 채점기준에 맞춘 ‘판매전략’의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고급 기술에만 치중한 일본 기업도 지금은 고전하고 있지만 ‘한국적 요소’를 반영하면 좋아질 것이며, 이게 ‘삼성으로부터 배우자’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부족하다고 본 ‘한국적 요소’는 “일본의 첨단 기술을 잘 결합해 좋은 제품을 대량생산하는 노하우와 체력”(다카하시 교헤이 쇼와덴코㈜ 사장)일 뿐이고, “고객이나 시장에 맞춰 만들어 팔려는 자세”(스가 요시히데 중의원 의원)이다. 곧, 일본도 제품과 서비스의 수준과 판매대상을 낮추거나 다변화해 한국 등과의 시장경쟁을 본격화하겠다는 얘기다. 일본이 한국에 기대하는 역할도 달갑지만은 않다. 민주당 정부는 ‘아시아 전체의 수요를 일본의 내수로 보자’고 주장한다. 나카오 다케히코 재무성 국제국장은 이에 더해 “제도적 통합은 아직 아니라도 아시아의 실질적인 통합을 이뤄내는 게 일본의 전략”이라고 말했다. 그런 구상에서 한국은 일본의 기술을 활용하는 생산전진기지이고, 함께 중국에 맞서는 기축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한·일의 협력”(센고쿠 요시토 국가전략상)과 “크기만 다를 뿐 쌍둥이 같은 한·일의 시장통합, 경제통합은 자연스러운 일”(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교수)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중국의 오만과 방약무인을 지적한다. 그런 식으로 선택을 강요하는 분위기는 곤혹스럽다. 지난 수십년간 벤치마킹의 대상이었던 일본이 이제 거꾸로 한국을 배우겠다는 모습은, 아직은 어색하다. 그들이 실패에서 교훈을 찾겠다면, 우리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좋은 반면교사가 있다. 2002년부터 2007년 사이 경기확장기에 일본 기업들이 사상 최고의 실적을 경신하는 동안 일본 근로자의 평균임금은 되레 떨어졌다. 중소기업들에 온기가 미치지 않아 임금인상의 여력이 없었던데다, 파견근로 확대로 비정규직이 늘어난 탓이다. 그 결과가 사회 양극화, 소비 부진의 디플레다. 일본은 지금 뒤늦게 제조업 파견근로를 금지하는 등 고용 안정화와 민간소비 촉진을 서두르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그런 데서 교훈을 찾기는커녕 비정규직 확대 등 ‘역주행’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 결말이 걱정된다. 그때 우리는 실패에서 배울 수나 있을까. 여현호 논설위원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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