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길 온·오프통합 오피니언 추진팀장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주임검사는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였다. 그가 세간에 이름을 올리고 정계까지 입문하게 된 것은 이 사건 주임검사라는 경력 덕분이다. 그는 경찰 고문으로 숨진 박군의 부검 현장에 입회해, 경찰이 은폐하려던 고문치사를 밝혀내는 데 ‘한몫’을 한 강직한 검사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군부독재의 망령이 완전히 청산된 1998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자 <안 검사의 일기>라는 책을 내고 당시의 ‘활약상’을 공개했다. 그 뒤 정계로 갔다. 한국 군부독재에 조종을 울린 이 사건의 폭발력은 정권이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한 시도에서 비롯됐다. 특히 박군을 고문치사한 경찰관이 애초 검찰 수사대로 2명이 아니라, 주범 3명이 더 있었고, 이를 정권이 적극 은폐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석달이 지나 이 내용은 천주교 사제단에 의해 폭로되며, 6월 민주항쟁을 이끈 기폭제가 됐다. 결론부터 얘기하자. 이 사건의 핵심인 은폐조작의 책임에서 안 원내대표는 결코 자유롭지 않다. 당시 수사 과정에서 그는 최초 범인 2명으로부터 주범 3명이 따로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결국 주범들을 기소하지 않았다. 법적으로 따지면 그는 직무유기로 처벌받아야 한다. 당시는 군부독재 시절이었고, 그리고 당연히 있었을 외압을 고려하면, 일개 평검사가 소신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적어도 이 외압에 적극 맞섰을까? “1987년 2월27일 조○○으로부터 고문에 참여한 경관으로 황○○, 반○○, 이○○가 더 있다는 얘기를 듣고… 검찰측에서는 절대로 덮을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덮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는 것이다.”(<안 검사의 일기> 중에서) 수사의 주체인 그는 전언과 피동태로 이 사건을 묘사한다. 은폐조작에 맞서야 할 수사검사로서 그의 적극적 역할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당시 안기부 J단장으로 불린 정형근 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 자신을 만나 ‘이 문제를 덮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밝혀, 정권 상층부의 책임으로만 돌린다. 이는 결국 그가 은폐조작을 수용한 것을 말한 것이다. “신문에 범인 2명을 송치했다는 보도를 읽고 안 검사에게 전화를 하였다. ‘박군이 건장한데 둘이서 고문을 할 수 있나. 더 있다’라고 하니까 ‘부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답하길래 ‘더 해봐’라며 전화를 끊었다… 이 후 2명을 기소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나 안 검사에게 전화를 걸어 ‘둘밖에 없어?’라고 하자 ‘3명이 더 있는 것 같다’고 하였고… 결국 범인들과 같은 교도소에 있던 이부영에 의해 축소 사실이 파악되어…”(진실화해위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관계기관대책회의 은폐·조작 의혹> 조사 보고서 중 최환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 증언) 진실화해위의 보고서는 검찰에서 최초로 이 사건을 인지해 부검을 관철시킨 최 부장 등 당시 검찰의 일선 지휘부가 수사에 나름대로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안 검사의 바람막이가 될 수 있는 지휘부의 태도보다 그가 더 적극적이었다는 정황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김대중 정권 들어 <한겨레21> 인터뷰에서 “그때 차라리 내가 폭로를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는 말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아쉬움이라는 도덕적 책임이 아니라 적어도 직무유기, 더 나가면 은폐조작에 일조한 형사책임을 져야 한다.
그는 요즘 입만 열면 ‘좌파 척결, 좌파 적출’을 말한다. 박군은 그의 논리대로 하면 좌파이다. 좌파인 박군이 흘린 피를 팔아 입신한 그를 보면, 한국 우파의 수준이 어디에 있는지 절망하게 된다. 정의길 온·오프통합 오피니언 추진팀장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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