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섭 논설위원
어느덧 계절은 봄인데 봄 같지 않다. 날씨뿐 아니라 마음까지 아직 추운 겨울이다. 서해에서 군함이 침몰해 많은 군인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햇살이라도 좀더 따뜻하게 비쳤으면 좋겠다 싶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꽁꽁 언 가슴을 녹여주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사람들의 언 가슴이 쉬 녹지 않는 건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생활은 나아질 기미가 없고 희망을 걸 징후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현재 삶에 대한 불안에, 장래에 대한 불안까지 가실 줄 모른다. 그 가운데서도 큰 불안 중 하나는 주거 불안이 아닐까 싶다. 언제 집을 비워주고 떠나야 할지 조마조마해하거나, 소박한 집이 있어도 빚더미에 앉아 있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럴수록 더욱더 집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니 여유는 찾아오지 않고, 봄날 햇살을 마음껏 즐길 처지도 못 된다. 어떤 사람들은 집착과 욕심을 버리면 행복이 찾아온다고들 한다. 이런 ‘무욕 예찬’은 보통 종교인이나 우파들의 단골 메뉴다. 구조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은 좌파 또는 진보적인 이들은 욕심을 줄이자고 말하길 꺼렸는데 요즘은 조금 변한 것 같다. 세계적인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반성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욕심을 버리자는 주장을 그전보다는 쉽게 내놓는다. 진보적인 연구집단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이 펴낸 책 <2010 성장률 속에 감춰진 한국사회의 진실>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이 책에 실린 ‘지혜로운 가정경제 운용을 위한 제언’이라는 글은, 10억원쯤 하는 아파트 두 채 때문에 소득의 25% 이상을 이자로 부담하는 맞벌이 부부 예를 들면서 ‘머니게임’에서 빠져나오자고 말한다. 돈놀이를 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던지고 빚을 최대한 줄이면서 소비 욕망에서도 벗어나자는 것이다. 공감이 가는 말이긴 한데 이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경험에 비춰볼 때 주거가 안정되지 않으면 실천이 어려운 이야기다. 주거가 불안한 사람은 목돈에 대한 강박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다. 집은 단순히 잠자는 곳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쓰지 신이치라는 일본 인류학자는 <행복의 경제학>이란 책에서 주거란 “사는 사람의 개성과 자발적인 생명력을 키워 자기실현을 도모하는 장소”라고 지적한다. 또 “가족은 물론 주위의 자연환경과, 또 지역 주민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가는 문화적인 공간이어야 한다는 말”이라고 덧붙였다.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요즘 ‘진보의 재구성’을 외치는 목소리가 많다. 누구는 복지국가론을 통해, 또 누구는 ‘기본소득’ 도입을 통해, 또 누구는 ‘우리 안의 성장과 발전 욕구’를 버림으로써 진보를 새롭게 구성하자고 한다. 모두 나름대로 중요한 말들이다. 하지만 더 시급한 것은 서민들에게 적절한 주거공간을 싼값에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분양 아파트가 넘쳐나는 지금이야말로 공공임대주택을 대폭 확대함으로써 실현할 수 있는 일이다. ‘반값 아파트’로 공급해봐야 서민들로선 빚을 얻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그래선 주거 안정은커녕 부담만 가중시키기 십상이다. 서민들이 집 걱정만 안 해도 많은 것이 바뀌리라고 본다. 개발과 성장 일변도 정책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줄어들 것이고, 편안한 노후를 위해 주식이나 펀드에 투자하라는 말에 시큰둥하게 반응할 사람도 늘어날 것이다. 이렇게 될 때에야 ‘무욕 예찬’은 진정성 있는 말이 되고, 서민들의 가슴에도 봄날 햇살이 비칠 것이다.
신기섭 논설위원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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