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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독극물 든 당의정, 대학의 기업화 / 홍윤기

등록 2010-03-30 20:54

홍윤기  동국대 철학과 교수
홍윤기 동국대 철학과 교수




중앙대학교가 ‘회계학’을 교양필수로 지정하려고 한다는 얘기를 재작년 처음 들었다. 신임 이사장인 두산그룹의 박용성 회장이 “기업인들에게 ‘애들 뽑아 놓으니 숫자는 좀 알더라’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는 괴담도 돌았다. 나는 그 전언을 일종의 험구성 개그로 치부했다. 두산그룹 집안이라면 미국 명문대학에 유학한 형제분도 있지 않은가? 세상이 아무리 험악해도 이사장님을 그렇게 대학교육도 모르는 거시기로 모독해도 되나?

그런데 중앙대는 회계학을 정말로 교양필수 격인 ‘공통교양’ 과목으로 삼아 ‘회계와 사회’라는 과목명으로 2009년 1학기부터 단과대별로 실행에 들어갔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대학의 학문단위를 재편성하기 위해 학내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했던 계열위원회가 본부 쪽의 강행안에 부닥쳐 불협화음만 내고 깨졌다는 소식도 같이 있었다. 본부 쪽은 취업률을 기준으로 학과의 존폐를 결정하겠다는 안을 관철시킨 모양이다.

내가 몸담은 대학이 어느 정도 선도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아무리 기업경영 마인드를 도입한다고 해도 대학의 교양필수 과목에 회계학을 집어넣은 것은 천만번 곱씹어도 너무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한 세계 대학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또 나의 존경스러운 회계학과 동료교수들이나 회계사분 중에서도 회계학을 대학생 교양필수로 해야 한다는 분은 없었다.

이 사례는 단순히 중앙대의 일회성 가십이 아니다. 그것은 대학을 기업에 예속시키는 선을 넘어 아예 대학 자체를 기업화시키려는 자본독재적 발상의 극점에서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스캔들이다. 이 과정의 종말 사태는 거의 파국적이다.

현대사회에서 대학은 그 어떤 이유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두 가지 근거 위에 존립한다.

하나는, 비록 다종다양의 연구기관과 지식인들이 있더라도 대학은 여전히 인간과 세계에 관해 가장 안정된 최고급 지식을 창출하고 교육하는 지식조직이라는 점이다. 이에 못지않은 대학의 또다른 존립 근거는 그것이 인간 사회, 나아가 지구 인류가 자유롭고 정의롭게 살 수 있는 실천적 가치원칙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제시한다는 것이다. 즉 대학은 그 사회와 국가, 이 지구의 시민들이 단지 현재의 순간적 이해득실을 넘어 미래까지 살아갈 삶의 양식을 설계하는 일종의 미래투자처이다.

대학을 회계장부나 들여다보는 기업의 신입사원 연수원 정도로 만든다고 치자. 솔직해 보자. 도요타의 예에서 보듯이 전지구적 수요가 포화상태인 현재의 시장 상황에서 어떤 나라 기업의 수명이든 몇십년을 넘기기 어렵다. 이 시대 모든 기업의 노력은 자본과 기술을 집약하고 노동력을 극도로 절감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 미래 세대를 모두 기업의 사원으로 훈련시켜 놓은들 그들 모두를 고용해줄 기업이 있기나 한 것인가?


자식들을 바로 취직시키고자 하는 학부모들에게 회계장부 보는 기능을 수련시키는 것이 좀더 믿음직스럽게 보이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기업의 간택을 받기 위해 피나게 스펙을 쌓은 젊은이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가를 정직하게 투시할 필요가 있다.

대학을 사원연수원으로 만들어 기업 취직 이외의 삶의 전망을 차단하는 것은 전국적으로 대학 졸업자들의 능력을 기업 수준 이하로 떨어뜨리는 일이다. 그것은 곧 국가적 발전 역량을 기업의 명운과 같이 묶어 기업이 흔들릴 때 국가도 같이 흔들리게 만드는 망국적 처사이다. 대학의 기업화? 그것은 가망 없는 치료를 미끼로 독극물이 든 당의정을 학생과 학부모, 궁극적으로는 이 국가와 인류에게 먹이는 기만일 뿐이다.

홍윤기 동국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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