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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프리즘] “앞만 보고 가자” / 최우성

등록 2010-04-01 20:46

최우성 산업팀장
최우성 산업팀장




간결했지만, 강렬한 멘트였다.

“지금이 진짜 위기다. (…) 다시 시작해야 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 급기야 어떤 언론인은 “‘아름다운 시’요, 잠언”이라며 공개적으로 칭송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슬픈 시였다.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는 잠언이었다기보다는 폐부를 예리하게 후벼 파는 날카로운 송곳에 가까웠다. 그의 짧은 한마디로, 세상은 이제 ‘과거’에만 매달리거나 기껏해야 ‘현재’에 안주하는 정신나간 종족들과, ‘미래’를 향해 뛰어가는 철든 종족들로 홍해 물길 갈리듯 쫙 갈라졌다. 마치 텔레비전 속 ‘○× 놀이’라도 하듯이, 세상은 ○와 ×의 두 선택지 가운데 어느 편에 붙을지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선택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그가 던진 한마디를 수없이 곱씹어 보노라니 문득 오래도록 잊고 있던 단어가 떠올랐다. 언어학자들이 쓰는 용어 가운데 ‘전(前)미래’란 게 있다. 현재와 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제3의 시제다. 언어학계에서만 통용되던 이 단어에 정작 깊은 의미를 부여한 건 일군의 사회과학자들이었다. 미래 시점의 어떤 변화나 행동을 위해선, 반드시 그에 선행하는 어떤 변화나 행동, 달리 말해 ‘전제조건’이 필요하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열심히 노력한다면 다음번 자격시험에 합격할 거야’라고 했을 때, 합격이라는 미래에 이르는 과정에 노력이라는 전미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화려한 ‘복귀’는 있었을지언정, 미래는 아직 온전히 그의 편은 아닌 듯 보인다. 짧고 강렬한 멘트 한마디로 과거와 현재의 문턱은 가볍게 넘어섰을지 몰라도, 미래에 이르는 마지막 고비인 전미래라는 관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탓이다. 정확히 말하면, 책임과 소통, 신뢰를 뼈대로 하는 전미래는 어느 곳엔가 깊숙하게 ‘침몰’된 상태다.

뼈를 깎는 경영쇄신에 나서면서 “모든 책임을 지겠다”(2008년 4월22일)던 약속은 어느새 “사회 각 분야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2010년 1월)는 가르침으로 돌변했다. 책임의 침몰이다. ‘삼성을 지켜보는 모임’(삼지모)을 만들면서 “사회의 비판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다”(2006년 5월23일)던 다짐은 “모든 국민이 정직해졌으면 좋겠다”(2010년 3월5일)는 설법으로 돌변했다. 소통의 침몰이다.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을 통해 “삼성이 비대해져서 느슨해진 것을 몰랐다”(2006년 2월7일)던 자성은 급기야 “앞만 보고 가자”(2010년 3월24일)는 구호에 밀려났다. 신뢰의 침몰이다.

양에서 질로,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옮겨가던 세상은 이제 아예 질의 단계를 넘어 격의 단계로, 정보사회의 단계를 거쳐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 성큼 다가서고 있다. 소통, 책임, 신뢰야말로 삼성이, 그리고 우리 사회가 비로소 격의 단계에 접어드는 전미래의 뼈대다.


소통, 책임, 신뢰를 헌신짝처럼 내던지는 것은 삼성의 과거와 현재 자체를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다. 더욱 중요한 건, 그의 바람과는 달리 소통, 책임, 신뢰 없이는 결코 앞으로 한걸음도 내달릴 수 없다. 앞을 보지 않는 것이거나, 아예 그릇된 방향으로 홀로 내달리는 것이다. 지금도 버려진 채 어느 구석을 떠돌고 있을 소통과 책임, 신뢰를 되살려내지 못하는 한, 삼성의 위기, 나아가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 삼성을 자랑스러워하는 우리 사회의 위기는 영원히 ‘현재진행형’일 뿐이다. “지금이 진짜 위기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최우성 산업팀장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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