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섭 논설위원
지금은 기억에서 사라진 엔론이라는 미국 기업이 있다. 2001년까지 첨단 에너지 기업으로 평가받다가 회계 조작이 들통 나면서 하루아침에 사라진 곳이다. 그해 말 이 회사의 회계 부정 사건은 세상을 경악하게 했는데, 최근 그 내용을 소상히 밝힌 책 <엔론 스캔들>을 읽으면서 새삼 충격을 받았다. 얼마 전 번역되어 나온 이 책은 탐욕에 눈먼 경영진이 얼마나 뻔뻔한 짓을 했는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엔론은 복잡한 수단들을 동원해 실적을 뻥튀기했는데, 그 핵심은 미래를 착취하는 것이었다. 천연가스 유통업과 발전소 건설을 주 사업으로 한 이 회사는, 미래에 팔기로 계약한 천연가스나 건설 예정인 발전소를 현재의 수익으로 둔갑시켰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계약을 담보로 증권을 발행해 챙긴 현금을 당기 실적으로 잡는 식이다. 경영진은 이렇게 실현되지 않은 실적을 당겨 써버리고도 자전거 바퀴 돌리기 식으로 계속 생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행태를 이 회사의 어떤 임원은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미래로부터 빌려왔다”고 표현했다고 한다. 누구나 이 이야기를 들으면 멍청하고 무모한 짓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어리석음은 엔론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도 때때로 비슷한 실수를 한다. 신용카드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물건을 사들이고 카드빚을 ‘돌려막기’로 근근이 이어가는 행태 같은 게 그렇다. 개인이나 개별 기업이 이런 잘못을 저지를 때는 그나마 문제가 덜 심각하지만 국가적인 규모로 가면 정말 큰 일이 된다. 정부가 밀어붙이고 있는 4대강 사업이 걱정스러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4대강 사업은 ‘미래 착취’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천 정비니 수질 개선이니 하는 건, 미래 세대의 몫인 자연을 눈앞의 이익을 위해 고갈시키는 추악함을 가리는 포장술에 불과하다. 정부의 주장대로 잘 정비된 강변에서 관광사업이 번창한다 할지라도, 미래 세대한테 넘겨줄 자연을 고갈시키는 행위는 변함이 없다. 인공물로 넘쳐나는 땅을 물려받은 미래 세대는 뭘 파먹고 살려 해도 할 수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자연은 한번 망가뜨리면 쉽게 회복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피해는 두고두고 이어지게 된다. 엔론의 실적 조작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무시무시한 죄악이다. 시각을 조금만 넓히면 교육도 비슷해 보인다. 교육은 본래 우리가 가진 것을 미래 세대한테 투자하는 일이지만, 한국의 교육 현실은 정반대가 됐다. 당장의 이익과 욕심을 위해 미래 세대를 볼모로 삼는 일이 된 것이다. 공부 잘하는 학생을 싹쓸이하는 외고나 외고생을 한명이라도 더 뽑으려는 대학들의 행태가 그렇다. 학생들이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게 아니라 학교 실적 올리기에 유리한 학생들을 뽑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사교육도 마찬가지다. 특목고 합격생을 많이 낸다는 유명 학원들은 일정 실력이 되는 학생들만 뽑은 뒤 그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분량의 숙제를 내준다. 대부분은 못 견디지만 이걸 버텨내서 특목고에 합격하는 학생들은 학원의 영업을 위한 실적으로 활용된다. 공교육도 점점 이런 학생 쥐어짜기를 닮아가고 있다. 사교육 절감 대책으로 내세우는 ‘방과후 학습’이 딱 이 모양이 되어가고 있다. 미래 착취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일부 대학생의 ‘학업 포기 선언’은 이런 ‘착취 구조’에 틈이 생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처럼 느껴진다. 그전 세대가 자식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맸다면 이젠 눈앞의 욕심을 졸라맬 때다. 이런 각오가 없이는 좀처럼 제대로 된 해법을 찾지 못할 것 같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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