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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문화칼럼] 한 독문학도의 절망 / 이명원

등록 2010-04-09 19:40

이명원 문학평론가
이명원 문학평론가




지난 4월8일 중앙대 약학대학 신축공사장의 타워크레인에서 독문과 학생이 고공농성을 벌였다. 그날은 중앙대 재단이사회가 교수와 학생, 대학평의회의 격렬한 반대에도 대학 구조조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날이기도 했다.

두산그룹이 중앙대 재단을 인수한 이후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해당 대학의 구성원은 물론 뜻있는 지식인들은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특정 학과의 통폐합 문제 때문이 아니다. 이번 사태는 근대 대학의 이념인 상아탑의 붕괴와 교양인의 추방을 의미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근대적 연구중심대학의 효시는 프로이센제국 당시 설립된 베를린대학이다. 이전까지의 유럽 대학은 신학과 교회법을 중심으로 한 강의중심대학이었다. 베를린대학은 무엇보다 학문의 자유와 인문학을 중심으로 한 연구기능을 중시했고, 교양인의 이념(상아탑)을 착근시켰다. 교양으로 번역되는 빌둥(Bildung)이라는 독일어 단어 속에는 ‘진리에의 소명과 헌신’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독일 대학 모델은 머지않아 미국과 유럽, 일본 등에 전파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베를린대학 유학생의 과반수가 미국인이었다는 점인데, 이것이 이후 존스홉킨스대학이나 시카고대학과 같은 미국식 연구중심대학이 성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 대학은 대체로 기업과의 연계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갔고, 그것이 실용주의에 입각한 전문대학원 체제로 귀착되었다.

한국의 대학은 일제강점기에는 독일식 대학 모델이 지배적이었다가 해방 이후 미국식 모델이 도입되어 경합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 두 모델의 경합 또는 완충적 결합은 교양인과 전문가의 동시육성이라는 근대화의 복합적 목표의 충족이라는 점에서 볼 때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경제위기 전후인 199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교양인의 이념은 거세되는 것과 동시에 이전의 전문가주의로부터도 벗어난 인적자원 논리가 국가와 기업의 호위 속에 대학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노골적인 직업훈련 개념이 대학교육과 연결되는 것은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이기에 개탄스럽다.

타워크레인에 올라간 독문과 학생의 영혼은 절망으로 범람했을 것이다. 요 몇 년 사이 중앙대 독문과는 기묘한 학문적 수난의 무대가 되고 있다. 학문적 역량과 무관하게 진중권 겸임교수가 재임용에서 탈락하고, 발군의 연구업적을 축적했던 독일연구소가 학진 공모사업에서 배제되더니, 이제는 학과마저 해체될 상황에 빠져 있다.


루카치가 꿈꾸었던 창공의 빛나는 성좌들, 괴테가 제시한 청춘의 편력, 무의식의 심해로 자맥질했던 프로이트, 화폐의 신비를 탐구한 마르크스, 베버의 자본주의 정신, 아도르노가 천착했던 이성의 자기배반, 브레히트의 소격효과, 베냐민의 ‘역사의 천사’가 속한 세계가 독일 문학이다. 그러나 지금 한 독문학도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폐허와 잔해가 되어 거친 폭풍우에 휩쓸리고 있는 영혼 없는 세계다. 괴테가 그의 작중인물인 빌헬름 마이스터를 통해 범속한 노예상태 너머의 예술을 꿈꾸고 또 방황하게 만들었듯이, 이 독문학도는 청년기의 영혼이 요구하는 저항의 형식을 선택했다. 그는 자유인이다.

이명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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