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 기자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공상과학소설의 누아르 프로핏(검은 예언자)’으로 불리는 윌리엄 깁슨이 1980년대 초 발표한 소설 <뉴로맨서>(Neuromancer)에서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이버스페이스를 가상공간이라고 번역하면서, 가상공간에서 펼쳐지는 세상을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라고 부르게 됐다. 유비쿼터스 환경이 가속화한 최근에야 ‘버추얼’을 ‘가상’이 아니라 ‘실효’로 번역해야 한다는 철학자 김용석의 주장이 옳았음이 입증되고 있다. 가상현실은 이제 삶의 일부로서의 실효현실이 된 지 오래다. 건물을 향해 휴대전화를 갖다대면 건물 안의 병원과 음식점의 상호를 보여주는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서비스는 ‘실효’가 된 ‘가상’의 한 단면이다. 종이에 고무슬리퍼를 그리면 진짜 고무슬리퍼가 튀어나오는 3디(D) 프린터도 등장했다. 증강현실은 실제 현실과 가상세계를 융합해 사용자의 감각으로는 얻을 수 없는 정보를 제공한다. 이 융합은 영화에 쓰이는 3디 기술이 실제 현실에 터치를 가해 변형시키는 것과 같다. 증강현실 세계의 ‘포스트모던함’은 ‘진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고루하게 만들어버릴 정도로 강력하다. 정보 제공자의 의도에 따라 왜곡된 진실, ‘마사지’된 진실이 존재할 가능성도 커진다.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모든 현실은 매체를 통과한 ‘매체현실’이며, 모든 사건은 여론이 들끓을 때에만 출현하는 ‘여론사건’이라고 말했다. 황장엽 암살단을 체포했다는 국가정보원의 발표를 보도하는 보수신문들의 태도, 영구미제로 남을 가능성이 높은 천안함 침몰 원인을 북한의 어뢰만으로 몰아가는 방송사들의 선정적인 뉴스를 보면, 지방선거라는 ‘증강현실’이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 같다. 이 땅에 다시 북풍이 불고 있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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