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순 대기자
권위주의 정권 시절 감옥에 가기를 밥 먹듯이 했던 박형규 목사의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가 얼마 전에 나왔다. 한편의 민주화운동사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책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반독재 투쟁 시기보다 8·15 해방 전후나 자유당 정권 때의 얘기에 더 관심이 쏠렸다.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영락교회·경동교회 등의 자리가 일제강점기에 일본 종교인 천리(덴리)교 건물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미군정시대에 재빨리 불하받은 덕분이다. 20대 청년 시절 박 목사는 뜻하지 않게 이승만 정권의 미움을 산 적이 있다. 친구의 권유로 부산 미국문화원에서 도서 정리하는 일을 한 것이 인연이 돼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문화원장의 권유로 여권도 없는 상태에서 도쿄로 건너가 유엔군 방송에 근무했다. 주로 영문 보도자료를 우리말로 옮기는 일이었다. 53년 늦은 봄 잠시 서울로 출장을 와 현재의 케이비에스인 중앙방송국에서 방송국장 보좌관 구실을 했다. 휴전반대·북진통일을 외치는 관제시위가 연일 벌어지자 미 극동군사령관은 북진을 주장하는 시위에 관한 보도는 물론이고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도 방송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국인 직원들이 대통령 연설을 방송하지 않을 수 없다고 버티자 북진이라는 말이 나오면 그 부분만 잠시 전원을 끄는 것으로 타협이 이뤄졌다고 한다. 이 사실이 알려져 박 목사는 오랫동안 여권을 발급받지 못해 고생을 했다. 현시점에서 생각하면 우스꽝스러운 일화로 보이지만 한반도의 정치지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68년 1월 북한군이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해군의 첩보선 푸에블로함을 나포하려 했을 때 주한 미공군의 F-105 전폭기는 긴급출동을 하지 못했다. 베트남전쟁 와중에 중국을 겨냥해 핵무기만 탑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핵무기를 재래식 무기로 바꿔 장착하는 데 여러 시간이 걸렸다. 한국 공군의 출격 요청은 찰스 본스틸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 거절했다. 한국군의 과잉대응으로 통제불능 사태가 벌어질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천안함 침몰사건의 조사결과가 조만간에 발표될 것이다. 미리 예정됐던 것이야 아니겠지만 시기적으로는 6월 지방선거를 코앞에 둔 시점에 민감한 결과가 나온다. 언론에 보도되는 흐름을 보면 이미 결론은 북한의 소행으로 나와 있는 것 같다. 국내용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으려면 증거와 판단 근거가 명백하게 제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정부가 북한을 용의자로 지목해놓고 어떻게 대응해갈지도 주목거리다. 최종방침을 정해야 할 이명박 대통령은 한국전쟁의 직격탄을 맞은 피해자 가족의 일원이다. 전쟁 초기 영일군 흥해면의 큰아버지 집에 피란해 있을 때 비행기 소리가 나더니 바로 머리 위를 훑고 지나갔다. 당시 ‘쌕쌕이’로 불리던 미군 전투기가 사라지고 나서 마당을 보니 막내 남동생을 업고서 달래던 바로 손위 누나가 쓰러져 있었다. 피투성이가 돼 온몸에 화상을 입은 두 사람은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두 달 뒤 숨졌다. 이 대통령의 비극적 가족사는 아마도 종로구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앞두고 95년 낸 것으로 보이는 <신화는 없다>라는 책에 비교적 상세히 기술돼 있다. 남북 분단과 이념대결은 늘 죽은 누나와 동생의 모습으로 귀착되곤 했다고 이 대통령은 썼다. 그는 천안함 침몰 후 국민이 정전상태를 잊고 살아가고 있다고 나무라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비정상적 정전상태를 오랜 기간 해결하지 않고 방치한 책임은 정치인에게 있다. 그것을 해결해야 할 가장 큰 책무는 현재 이 대통령에게 있다.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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