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본영 국제뉴스팀 기자
강대국들의 대리전으로 규정하든 해방된 민족의 내적 모순 폭발로 보든, 한국전쟁은 2차대전과 ‘인연’이 깊다. 한국전쟁은 상당한 무기, 인력, 전쟁 기술을 2차대전과 그 여파인 중국 국공내전으로부터 물려받았다. 2차대전과 한국전쟁은 모든 것을 쏟아부으면서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20세기 총력전의 전형이었다. 2차대전의 발발과 종식은 이미 60돌을 지났다. 그 ‘잉여 전쟁’인 한국전쟁도 곧 60돌을 맞는다. 유럽과 한국이 전쟁 60돌을 기억하는 방식은 기준점부터 다르다. 한국에서는 개전이 중요하다. 한국전쟁과 6·25전쟁은 같은 말이다. 휴전협정 조인일인 7월27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훨씬 적다. 반면 유럽에서는 종전일인 5월8일(서유럽) 또는 9일(러시아와 동유럽)이 주로 기념된다. 나라마다 독일군 침공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라도 종전일이 중요할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 대한 기억과 태도를 보려면 한국은 개전일, 유럽은 종전일을 어떻게 맞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유럽도 0이 붙는 주기에는 특별한 의미를 둔다. 2004년 6월6일 노르망디 상륙 60년, 2005년 1월27일 아우슈비츠수용소 해방 60년, 같은 해 5월9일 종전 60년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프랑스의 노르망디 상륙 60년 행사와 러시아의 전승 60년 행사에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당시 독일 총리가 참석했다. 1944년생인 슈뢰더는 그해 동부전선의 루마니아에서 전사한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그는 “책임”을 말한 대가로 “화해”라는 따뜻한 말을 건네받을 수 있었다. 노르망디에서는 프랑스와 독일 노병들이 평화 기원 행사에 함께 참석했다. 유럽의 대지를 다시 피로 적실 수 없다는 의지의 산물인 유럽연합은 종전 60돌 선언문에서 “전쟁 대신 자유와 항구적 평화”를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유럽 재정위기로 조금 빛이 바랬지만, 올해 5월9일은 전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쉬망이 유럽 통합의 씨앗인 프랑스-독일 석탄철강공동시장 설립을 제안한 지 60년 되는 때라 겹으로 의미가 있었다. 전쟁 60돌을 맞는 한반도 상황은 지난달 한 신문에 실린 두 장의 사진이 대변한다. 유엔군 출신들은 남한으로, 중국 인민의용군 출신들은 북한으로 각각 그들만의 60돌 기념을 위해 들어왔다. 2차대전에서 적대했던 노병들은 노르망디에서는 손을 잡을 수 있었지만, 한국전쟁의 양쪽 노병들은 휴전선에 막혔다. 신문에는 아군의 활약상과 적의 잔학상, 민간의 간난신고를 테마로 한 기사가 홍수처럼 쏟아진다. 평화와 화해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기획은 정부에서든 민간에서든 찾기 어렵다. 한국 민족의 무엇이 열등하기에 유럽과는 반대의 길로 갔는지에 대한 성찰도 없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전쟁의 상처에 가장 적합하다. 60년은 전쟁 주역들은 물론 직접 총칼을 들이댄 젊은 병사들도 사라지게 만들 정도로 길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B29 폭격기 승무원들의 부음을 볼 일은 이제 거의 없어졌다. 그렇지만 한반도에서는 청산되지 않은 전쟁의 공포가 언제든 요구불예금을 찾으려는 예금주처럼 서성댄다. 천안함 병사들은 사고 원인이 피습이든 아니든 이 미청산 상태에 생명을 내줬다고 볼 수 있다. 토니 주트 뉴욕대 교수는 1차대전으로 재앙을 입은 독일이 30여년 만에 총을 다시 든 것은 이겨봤자 별게 없다는 것을 승전국은 알지만 패전국은 몰랐기 때문이라고 시니컬하게 분석한 바 있다. 상처는 깊고 얻은 것은 없기에 모두 패전했다고 할 한국전쟁을 생각하면 섬뜩한 경고로 들린다.
이본영 국제뉴스팀 기자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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