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순 대기자
재일동포 원로사학자인 강덕상씨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1923년 간토(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문제나 3·1독립운동 등 한-일 현대사를 전공한 그의 심기를 결정적으로 건드린 것은 일본의 공영방송 <엔에이치케이>(NHK)가 만든 역사 특집물이다. 엔에이치케이는 수년 전부터 일본의 근대를 돌아보는 기획을 준비해 결과물을 하나씩 내놓고 있다. 그런 기획의 하나가 일제의 조선 강제병합 백년을 맞아 제작한 <일본과 한반도>라는 시리즈다. 첫회분 ‘한국 병합에의 길,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이 4월 중순에 방영됐고, 2회분 ‘3·1독립운동과 친일파’가 5월 중순에 전파를 탔다. 작품이 완성되는 대로 순차적으로 공개한다고 한다. 방송사 누리집에는 5회까지 예정된 작품의 가제들이 이미 올라와 있다. 제작 과정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국치 백년이 되는 8월에는 전체 모습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인역사자료관 관장으로 있는 강덕상씨는 이토가 안중근의 손에 죽지 않았다면 한국을 강제병합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몰아간 것은 어처구니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3·1운동의 결과 조선인들의 독립운동 열기가 국내외로 널리 퍼져갔는데도 박은식이나 신채호 같은 독립지사가 아니라 일제의 회유에 굴복한 이광수·최남선 같은 변절자들을 부각시킨 것도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일 관계를 다루는 일본인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보통 일본인들은 안중근이 어떤 인물인지, 무엇을 추구했는지 거의 몰랐는데, 그런 점을 차분히 소개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내가 만난 일본인들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70대 중반의 한 언론인은 제작자들의 공부가 부족했다고 언성을 높였다. 민영 텔레비전 방송사의 한 간부는 다른 견해를 밝혔다. 수년 전부터 기획하고 다양한 자료를 보기 때문에 제작진의 공부 부족이라기보다는 ‘자주규제’의 탓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언론의 용어로 하면 자기검열이다.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해 기자나 피디가 스스로 말썽의 소지를 피해 표현의 정도를 순화시키는 것이다. 엔에이치케이의 역사 다큐멘터리는 그동안 우익의 공격을 많이 받아왔다. 전후보상 운동에 수십년 종사하고 관련 책을 꾸준히 내고 있는 한 사학자는 엔에이치케이의 연재물에 문제가 있으나, 내용 전체가 한국에 소개되지 않아 그다지 논란이 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프로를 맡은 책임피디나 외부제작사의 성향에 따라 접근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방송사의 정해진 방침에 맞춰 연재물이 제작되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강제동원을 다루는 3회분은 조금 기대를 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엔에이치케이의 역사 기획물에 대한 어정쩡한 평가를 접하면서 하토야마 정권의 지지부진한 과거사 정리 작업을 생각했다. 지난해 9월 출범 이후 첫 성과물이라 할 만한 것이 시베리아 억류자들에 대한 일시보상금 지급법안이다. 일본의 패전 때 소련군 포로가 돼 시베리아에 억류됐던 일본인 생존자들에게 25만엔에서 150만엔의 일시금을 주는 내용이다. 조만간 입법 작업이 완료될 이 법안의 적용 대상에는 일제 때 관동군에 끌려갔다가 억울한 억류생활을 한 한국인 등 외국인 생존자는 빠져 있다. 법안 추진 인사들은 자민당의 완강한 거부방침에 ‘바람구멍’을 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일본인부터 처리하겠다고 한국인 피해자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후속조처를 얼마나 진지하게 진행할지 지켜봐야 하지만 하토야마 정권의 현상을 보면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과거사 정리 작업을 되돌아보는 것은 별도의 문제다. 아마도 한국인 가운데 시베리아 억류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분은 아주 소수일 것이다. 더구나 한국의 방송사들이 엔에이치케이 정도의 노력을 해왔는지도 의문이다. 우리 방송사들은 국치 백년이 되는 8월에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까?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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