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순 대기자
김광열씨는 후쿠오카현의 후쿠쓰라는 작은 도시에서 살고 있는 재일동포다. 규슈지역에서 일제 때 강제연행의 실태를 30여년 면밀히 조사해온 연구자로 명성이 높다. 1928년생이니 세는 나이로 여든셋이다. 그는 중풍으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한 부인과 단둘이 지낸다. 늙은 몸으로 부인의 병구완을 하면서 조사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거실에는 건국훈장 애족장과 증서가 있고 두루마기 차림의 30대 남자 사진이 보인다. 그의 아버지에게 추서된 훈장이다. 이명박 대통령 명의의 증서는 2008년 8월15일치로 발행됐다. 사진은 그의 부친 김선기(호적상 이름은 김점학)의 젊은 시절 모습이다. 경북 달성(현 대구 달성) 출신으로 일제 때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공적조서를 보면 1906년생인 김선기는 27년 도쿄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해 활동하던 중 민족협동전선 운동의 필요성을 느껴 귀국해 동년 7월 대구청년동맹 집행위원, 신간회 대구지회 대표 등을 맡았다. 29년 7월에 체포돼 징역 1년을 받았고 30년 9월 장진홍의 옥중 순국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징역 8월을 받았다.
김광열은 부친이 일제 때 감옥을 여러 차례 들락날락했다고 말했다. 8·15 해방도 감옥에서 맞았다고 했다. 대구형무소에서 풀려난 김선기의 일제 때 수형기록은 초기 것을 제외하면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김광열씨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며 행정관청의 무성의를 서운해했다.
김선기의 항일운동 흔적은 그의 독립운동 후배인 박진목씨의 회고록 <지금은 먼 옛이야기>(1973)에 여러 차례 나온다. 이 회고록은 나중에 <내 조국 내 산하> <민초> 등으로 책명과 형태를 달리해 출간됐다.
박진목은 그의 장형 박시목이 주도한 독립운동에 연루돼 44년 5월 대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조치대학 철학과를 나온 박시목은 3·1운동에 참가했고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됐다.
감찰원으로 국내에 파견돼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아 전달했고 20년대 말에는 도쿄로 건너가 신간회 지회 결성을 주도했다. 그는 옌안의 조선의용군, 광복군과 국내의 항일운동 세력을 연결하는 운동을 벌이다가 베이징에서 아들 희규를 포함한 수많은 동지들과 함께 체포됐다.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그는 아들과 같이 옥중에서 숨졌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부자가 옥중에서 순국한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
장형보다 24살 연하인 박진목은 감방생활 경험이 많은 김선기가 수감 중 잘 지도해주었다고 썼다. 김선기는 형무소로 넘어갈 때 수사를 맡았던 일본인 경부에게 “전번에는 독립운동을 철저히 하다가 형무소살이를 했는데 이번에는 옳게 하지도 못하고 형무소로 가니 불쾌하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광열씨는 부친이 언제 어디서 숨을 거두었는지조차 모른다. 고향 선산에도 유골은 없다.
부친의 마지막을 아는 유일한 생존자는 박진목이다. 해방 후 건준 등 좌익운동을 하다가 피신한 김선기는 49년 봄께 서울 종로의 한 빵집에서 체포된 뒤 종적이 묘연하다고 한다.
김광열과 박진목의 가족사에 한정시켜 보면 항일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해방 전과 후 같은 사람들에 의해 쫓겨 다니는 서글픈 광경이 펼쳐진다. 남로당의 폭력투쟁 노선에 환멸을 느껴 이탈한 박진목은 한국전쟁 때 이념을 떠나 참혹한 전쟁을 하루빨리 끝내야 한다는 신념에서 1951년 미군 정보기관의 도움을 받아 평양으로 가 이승엽 등에게 ‘종전’을 호소했다.
이것이 나중에 김일성이 남로당 출신들에게 ‘미제 간첩’ 혐의를 덮어씌우는 빌미가 됐다고 한다. 보훈의 달이자 한국전쟁이 터진 6월에 난마처럼 얽혔던 민족의 수난을 생각한다.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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