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 기자
1차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항복 소식을 들은 것은 육군병원 병상에서였다. 바이에른 제16예비보병연대의 하사였던 그는 “무수한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면서 4년간 싸운 결과가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라며 부르르 떨었다. 독일 국민들은 굴욕적인 베르사유조약을 체결한 매국노들을 찾아나섰고, 사회민주당의 비둘기파와 유대인들이 ‘11월의 죄인’으로 지목됐다. 히틀러는 이들을 사무치게 증오하며 군에서 제대했다.
히틀러를 움직인 원동력은 바로 이 분노였다.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려던 ‘맥주홀 폭동’이 실패한 뒤 법정에 선 그는 특유의 언변으로 자신의 분노를 사회화시켰다. 독일인들은 자발적으로 법정 밖에 모여 나치당과 히틀러를 응원했다. 국가 내란죄 피고는 독일의 운명을 구할 영웅으로 둔갑했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국회 진입을 통해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을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태평성대에는 분노가 통하지 않는 법. 1924년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끝나고 외국 자본이 밀려들어와 경제가 좋아지자 나치당의 영향력은 쇠퇴했다. 그러다 1929년 세계 경제대공황이 터졌다. 경제는 다시 나빠졌고, 실업자가 급증했다. 나치당은 “연약하고 무능한 현 정부가 국민들을 도탄에 빠지게 만들었다”고 선동했다. 나치당은 1932년 7월 총선에서 최대 정당이 됐다. 히틀러는 1939년까지 철천지원수인 유대인 금융자본과 미국 자본을 이용해 전쟁을 준비했다.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거국적인 분노를 불러일으키려던 정부와 한나라당, 보수언론의 시도가 지방선거에서 실패로 끝났다. 분노의 외교적 결말은 전쟁이라는 걸 유권자들은 간파했다. 안보만은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대통령은 말했지만, 애당초 이 사건을 정쟁의 수단으로 이용한 것은 이 정권이다. 민심은 철지난 ‘안보 장사’ 대신 ‘실용적인’ 대북 해법을 바라고 있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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