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순 대기자
평소 티브이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고 연예계의 흐름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탓에 한국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은 일본인들을 만나면 대화를 이끌어 가는 것이 곤혹스럽다. 어쩌다 주한 일본대사관 근무 외교관들과 만나 얘기하다 보면 내가 보거나 들어보지 못했던 영화나 티브이 드라마들을 상대방이 먼저 화제로 내세운다. 칠팔년 전이었을까, 한국전쟁의 비극을 다룬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가 제작되고 있다는 것도 일본인 외교관에게서 들었다. 촬영 세트장이 관광코스가 돼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아줌마들이 바다 건너 몰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일본명이 ‘브러더후드’로 작명됐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며칠 전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하직한 연예인 박용하에 대한 일화는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한테서 들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퇴임하고 나서 도쿄대의 초청을 받아 방일한 것은 2005년 5월의 일이다. 도쿄대 야스다강당에서 강연을 하는 것이 주목적인데, 당시 실무적으로 초청작업을 주도한 이가 와다 교수와 강상중 교수다. 강 교수는 재일동포로서는 처음으로 도쿄대 교수가 된 사람이다. 와다 교수는 강 교수와 함께 하네다 공항에 영접을 나가면서 전직 대통령을 맞이하는 데 의전이 너무 소홀한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이 공항 로비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환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사연을 알아보니 박용하를 보러 나왔던 일본인 여성팬들이 김 전 대통령의 얼굴을 알아보고 환영의 박수갈채를 보낸 것이다. 와다 교수는 박용하 덕분에 체면이 섰다고 말했지만,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박용하가 누구인지 몰랐다.
한류 붐에 빠진 일본인들이 얼마나 헌신적이고 진지하게 행동을 하는지는 박용하의 비극적 죽음을 계기로도 확인됐다. 많은 팬들이 빈소로 달려와 조문을 하고 그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았다. 일본에서도 애도 분위기가 번져갔고 음반 판매도 급증했다고 한다. 역의 경우를 상정해보면 한국인 팬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났을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한류 붐이 일본인들의 한국 인식을 높여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방의 작은 도시를 가보아도 한국 드라마나 예능 프로를 보려고 한국말을 배우려는 일본인 여성들이 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원래 한-일 관계에 거의 관심이 없던 층이었다. 그럼에도 한류 붐에 몰입해서 다양한 경로로 한국에 대한 지식을 흡수한다. 여성뿐만 아니다. 남성들도 <모래시계> <서울 1945> 같은 드라마를 본 소감을 얘기한다. 이들은 이런 드라마를 통해 광주항쟁을 실감하고 해방 후 친일파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민감한 문제였는지를 이해한다.
일본에는 디브이디 같은 영상물이나 시디 음반을 빌려주는 대형 점포망이 활성화돼 있다. 한 일본인 교수는 나에게 그런 점포망을 접촉해서 일본인들이 주로 빌려가는 한국 영화나 드라마가 무엇인지, 그중에서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통계자료를 만들어보라고 권유한 적이 있다. 힘이 달려 실행에 옮기지 못했지만 조사를 해보면 재미있는 흐름과 현상이 드러날 것 같다.
주요 도시의 밤거리가 한산할 정도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는 모래시계가 국내에서 처음 방영된 것은 1995년 초다. 벌써 15년 전의 일이다. 이 작품의 대본을 쓴 작가나 연출한 분이 10여년 뒤 일본인들이 이 작품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배우리라는 상상을 해봤을까? <서울 1945>는 국내에서 소송 대상까지 됐지만 해방된 한반도가 어떻게 혼란에 빠졌는지 보여주는 교재가 된다.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한 정치인이 나중에 선거를 통해 대통령직에 오르는 것을 보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이해하고 한국이란 나라 전체를 재평가하게 됐다는 일본인들이 적지 않다. 영화·드라마 제작에 종사하는 분들이 이 점을 의식한다면 한류 붐은 두 나라의 화해에 더 큰 기여를 할 것 같다.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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