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국제뉴스팀장
런던 템스강가에 버려진 발전소를 미술관으로 개조한 테이트 모던은 2000년 개장과 동시에 그해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끌어모은 전시관이 됐다. 19세기부터 윌리엄 터너 등 영국 화가의 작품 전시로 유명한 테이트 브리튼까지, 4개의 무료개방 미술관을 운영하는 테이트는 고루한 내셔널 갤러리 등에 견줘 젊고 혁신적인 런던 예술의 상징이다. 이 테이트가 올여름 뜨거운 논란을 맞았다.
지난달 28일 유럽 예술계 최고 인사들이 모여든 우아한 테이트 브리튼의 여름파티. 검은 옷과 베일을 쓴 사람들이 나타나 병에 든 걸쭉한 검은 액체와 새 깃털을 계단에 쏟아버렸다. 2명의 여성은 초대받은 이들만 들어가는 파티장에 역시 액체를 부었다. 그 며칠 전 테이트 모던의 1층 홀엔 죽은 물고기 모양을 매단 검은 풍선들이 떠올라 직원들이 공기총을 들고 몰려나와야 했다.
이날 파티는 영국의 거대 석유회사 비피(BP)의 테이트 후원 20돌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같은 날 진보적 일간지 <가디언>에는 영국 예술가 171명의 이름으로 지난 4월 말 이후 계속되는 미국 멕시코만 기름유출의 주역인 비피의 후원을 테이트가 끊어야 한다는 공동서한이 발표됐다. 반면 레이디 가가, 백스트리트보이스, 크리드 같은 가수들은 자신들의 콘서트 투어에 비피의 스폰서 거부를 선언할 예정이다.
간단하다. 테이트는 부도덕하고 레이디 가가는 도덕적이다! …그런가?
다음날 <가디언> 온라인판엔 미술비평가 겸 기자인 조너선 존스의 글이 실렸다. 그는 “이제까지 테이트의 전시는 그 어디서도 비피나 다른 기업의 후원으로 인한 영향을 찾아볼 순 없었고 오히려 반자본적이기까지 했다”고 말한다. 재정적자 40% 감축을 약속한 새 보수당 정권하에서 정부의 예술계 지원금 대폭 삭감도 기정사실화되고 있는 터다. 존스는 “리버럴의 자기기만을 떨쳐내자”며 “전시관들이 튼튼하고 계속 무료로 남길 바란다면 사탄의 돈이라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용기있는 지적”이란 댓글이 새까맣게 달렸다.
실제 비피는 또다른 거대 석유회사 셸과 함께 영국 예술계의 가장 큰 후원자로 꼽힌다. 상업적·음악적으로 마돈나 이후 최대의 성공을 거둔 여가수 레이디 가가에게 후원을 할 기업은 세상에 널렸지만, 미술관에 후원하는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서구에서 ‘예술가’라는 지위가 르네상스 시대 패트런의 등장과 함께 확립됐음을 떠올린다면, 새삼 논란거리도 안 된다. 영국에서 이번 예술가들의 행동은 현실을 무시한 철없는 만용이란 지적이 쏟아졌고 일부 우파들은 ‘친환경 파시스트 유토피아니즘’이란 딱지까지 붙였다. 우리에게도 낯익은 논리 아닌가?
다시 한번 171인의 선언을 보자.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예술계가 담배회사의 후원을 받는 게 당연시됐지만 이제 그런 일은 사라졌다. 왜 기름회사엔 그런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가?” 작은 의문과 균열로 시작돼 세상의 상식이 뒤바뀌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러니까 “레이디 가가가 더 도덕적”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긴장감이 있다면, 기업들 또한 함부로 예술에 개입하거나 ‘사회적 책임’을 했다는 식으로 쉽게 넘어가진 못할 것이다. 테이트는 자신들의 윤리위원회가 스폰서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하고 있고 할 것이라고 다짐하며 “그들 또한 자신들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항의할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힘들어도 예술후원은 공공펀드를 더 늘려가야 한다는 대안들도 제기됐다. ‘테이트 논란’은 영국 사회가 그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김영희 국제뉴스팀장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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