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훈 영화배우
1985년 영화 <깜보>를 통해 배우가 된 저는 이듬해 86년에 그 영화가 개봉될 때 큰 히트를 치길, 당연한 얘기 같지만 몹시 기원했습니다. 영화는 관객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는 무수한 선배님들의 말씀도 있었지만, 인기라는 것이 궁금하기도 했고 얻어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청소년을 겨냥한 이 영화는, 당시 창작인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준 사전검열기관 공연윤리위원회가 수많은 장면을 가위질한 후 ‘미성년자 관람불가’ 판정을 해버려 그만 마케팅 전략 자체를 상실해 흥행에 실패하게 됩니다. 영화에서 두 주인공이 마지막에 헤어지는데 이 태평성대 5공화국에서 헤어지는 것은 ‘퇴폐’라는 이유에서였죠. ‘청소년 관람가’를 받으려면 우선 두 주인공이 헤어지지 않는 장면을 재촬영해 집어넣으라는 통보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지만 충무로 영화계에선 당시 공연윤리위원회의 광란의 사전 가위질로 인해 벌어지는 매우 흔한 일 중 하나였습니다.
두번째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의 완성본을 본 우리팀은 개봉 전 큰 흥행의 기대와 흥분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리 깊은 영화는 아니지만 당시 젊은 관객을 열광시킬 수 있는 재밌는 상업적 요소가 풍성했기 때문입니다.
1987년 7월4일 개봉 한 달 정도를 앞두고 우리는 극도로 긴장했습니다. 당시엔 요즘처럼 전국에 수백개의 극장에서 동시에 개봉하는 방식이 아니고 그저 서울시내의 한 개봉관에서만 영화가 상영되기 때문에 그 영화가 상영되는 종로3가의 서울극장 주변이 편해야 관객이 몰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87년 6월은 그 뜨거웠던 6월 민주화항쟁이 절정을 이루던 시기였습니다. 6월29일 항복선언이 나오기 전까지 서울시내는 상당구간이 통제구역이었고 그야말로 최루가스가 만연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한가로이 영화를 보며 여유를 찾을 수 있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던 것이죠.
6월 민주항쟁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위대한 역사이지만 저로서는 어떻게든 빨리 정리가 돼서 시내가 안정을 찾았으면 하는 마음이 우선 간절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라의 민주화란 대의 앞에서 제 개인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 몹시 죄송하고 부끄럽지만 당시의 제 솔직한 심정이 그러하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6·29선언 이후 거리와 정국이 급속도로 안정돼 이 영화는 원래의 예상대로 큰 히트를 쳐 그해 흥행 1위를 기록하며 저를 인기배우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어딜 가도 그 영화의 주제가 산울림의 ‘안녕’이 흘러나왔으며 청소년들은 저의 극중 이름 ‘철수’를 부르며 환호를 보내 주었습니다. 매일 수십통, 수백통의 팬레터가 전국에서 배달됐으며 집으로도 많은 팬들이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바라봐 주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신의학에서도 타인이 자신을 좋은 감정으로 바라볼 때 행복호르몬이 왕성하게 나온다고 합니다. 심지어 집 근처 세화여고 끝나는 시간에 맞춰 일부러 서성거리기도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행운스럽게도 전 그 후로 비교적 영화가 성공한 편이어서 인기를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어서 감사했지만, 한때 사회적 법령을 위반해 인기가 곤두박질친 적도, 또 어떤 때에는 계속 이어지는 흥행 실패 때문에 인기가 시들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마다 인기에 연연해서는 큰 배우가 못 된다며 스스로를 독려했지만 사실 인기가 흔들릴 때마다 참 고통스러웠습니다. 인기를 얻은 지 2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인기를 다루는 법을 몰랐던 것입니다.
인기라는 건 원래 박중훈이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관객이 인기를 가져다준 것이라는 것을 최근에야 뒤늦게 이해했습니다. 잘하면 유지시켜주고 잘못하면 가져가는 관객이 주는 선물과 질책이었습니다.
올해로 배우생활 한 지 정확히 25년이 됐습니다. 오랜 시간 많은 관객들에게 감사합니다. 박중훈 영화배우 트위터@moviejhp
올해로 배우생활 한 지 정확히 25년이 됐습니다. 오랜 시간 많은 관객들에게 감사합니다. 박중훈 영화배우 트위터@moviej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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