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부소장
시민단체나 지식인들의 민주당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다. 무시로 그 협량을 질타하고, 틈만 나면 그 옹졸함을 나무란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면 민주당으로선 섭섭할 만하다.
내친걸음, 좀더 편들자면 민주당이 잘해서 이긴 것이 아니란 논리에도 억지가 없지 않다. 세상에 어느 야당이 여당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나. 여권이 못해야 비로소 야당에 눈을 돌리는 것이 자연스런 패턴이다. 그러니 반사이익을 누리는 것은 야당의 정당한 권리이자 몫이다. 몰염치나 비양심이 아니다. 대공황이 났을 때 미국 민주당은 남부 지역주의에 안주하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반쪽 정당이었다. 그래도 미국 국민들은 1932년 그 민주당을 대안으로 선택했다. 그 찌질한 민주당이 뜻하지 않게 권력을 잡았지만 뉴딜개혁으로 미국을 바꿔놓았다.
그럼 우리나라의 민주당도 2년 뒤 운 좋게 집권하면 잘할 수 있을까? 지금의 민주당이라면 어려울 것이다. 미국 민주당이 성공한 것은 뉴딜 때문이다. 뉴딜의 참뜻은 공공사업, 공적부조가 아니다. 국민을 ‘새롭게(new) 대우하겠다(deal)’는 것이다. 즉 노동자와 농민 등 서민들이 대공황으로 고통을 겪어도 시장 불개입을 외치며 수수방관한 이전의 공화당 정권과 달리 그들 사회적 약자들을 정부가 존중하고 주권자로 대접하겠다는 자세전환이었다. 루스벨트가 그들을 잊혀진 사람들(the forgotten man)이라 부른 것은 그들을 잊지 않고 배려하고 돕겠다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양극화 피해자, 비정규직, 사회·경제적 약자들에 대해 이 땅의 민주당이 취하는 태도는 한나라당과 별반 다르지 않다. 루스벨트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연민하고 돌보는 따뜻한 리더십도 없다. 이게 민주당에 인색한 이유다.
새로운 변화는 저항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뉴딜개혁도 그랬다. 주요 뉴딜개혁법안에 대해 보수성향의 대법원이 위헌판결을 내려 폐기해버렸다. 이때 루스벨트는 개혁 페달을 더 힘차게 밟는 길을 선택했다. 이것이 노동관계법, 사회보장법 등을 위시한 2차 뉴딜개혁이다. 사회적 역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핵심이다. 기업이 압도적인 우위를 누리는 사회에 정치가 개입해 노동을 보호하고, 그 힘을 배양해주었다. 그래서 구축된 체제가 30여년 지속된 친서민의 뉴딜체제다.
이 땅의 민주당에겐 노동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 해외파병은 그렇게 열심히 반대하면서도 유독 노동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우리가 무너진 건, 그 핵심은 노동이에요. 핵심적으로 아주 중요한 벽이 무너진 것은 노동의 유연성을, 우리가 정리해고를 받아들인 것이에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통곡이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아직도 친노동(pro-labour) 정책 제시는 고사하고 엠비정부가 내미는 친기업(pro-business) 정책을 추인하느라 바쁘다. 양극화와 복지를 넘보는 건 오히려 보수다. 이쯤 되면 무관심을 넘어 무지의 수준이다.
민주당이 외치는 복지정책도 유럽의 경험에서 보듯 노동의 힘을 키우는 등 사회세력간 힘의 불균형을 시정하지 않으면 공염불이다. 대처나 레이건이 복지 축소 전에 먼저 노동을 제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민주당이 이런 복지‘정치’에 무지한 채 아무리 복지‘정책’을 외친들 허망할 따름이다. 이런 태세면 집권하더라도 금방 기업의 위협과 공세에 허물어질 것이다. 이 또한 민주당에 인색한 이유다.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성패의 요체는 지피(知彼)보다 지기(知己)다. 상대를 아는 것보다 나를 아는 게 더 중요하다. “상대와 나를 모두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고, 상대를 모르고 나만 알면 승률은 반반이며, 상대도 나도 모르면 반드시 패한다.” 상대를 몰라도 나를 알면 그래도 해볼 만하지만, 나를 모르면 무조건 진다. 2002년 지방선거 승리로 기고만장하던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패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 민주당이 그 길을 가는 듯해 걱정이다.
이철희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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