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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프리즘] ‘쓰메끼리’와 타워크레인 / 손준현

등록 2010-08-01 22:28

손준현 사회부문 선임기자
손준현 사회부문 선임기자
주말에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군포 당동파업 58일 만에 사측과 합의하고 농성 해제! 고맙습니다. 7/31 2:13 pm.” 건설노조 경기중서부지부 사무국장이 보낸 문자였다. 하지만 나는 “아닙니다, 고마운 건 바로 접니다”라고 속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70m 높이 타워크레인 위에서 건설노동자 황현수씨는 30일 가까이 고공시위를 벌였다. 그는 얼마 전 백일을 넘긴 아들의 얼굴이 자꾸만 어른거렸지만, 불법 하도급 관행 대신 직접고용을 쟁취하고, 상습적 임금체불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결코 내려갈 수가 없었다고 했다.

건설노조 경기중서부지부는 군포 당동 아파트건설 현장에서 하청업체와 불법 하도급 근절, 40일이나 체불되는 유보임금 기간 단축 등을 뼈대로 하는 임단협에 잠정합의했지만, 원청업체가 임단협 조인을 가로막아 파업에 들어갔다. 건설업계의 고질적인 다단계 하도급 관행은 발주처-원청-하청-불법팀장(십장)으로 이어져 건설노동자의 노동조건 악화는 물론 부실시공의 위험성도 크다.

나 역시 전국 건설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해묵은 하도급 관행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당동 파업 기사를 쓰면서도 “이분들, 참 이기기 어렵겠구나”라는 패배주의가 가슴속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기사를 쓴다는 것은 “나도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라는 일종의 알리바이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파업 건설노동자들에게 내가 되레 고맙다는 말이다.

파업 현장에서 십장 출신 박아무개씨를 만났다. 20여년 동안 건설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분이라, 손마디나 생각이 굵다 못해 통뼈가 된 분이다. 턱수염이 덥수룩한 그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목소리는 걸걸하다.

그는 ‘쓰메끼리’란 말만 들어도 울화가 치민다고 했다. 손톱깎이라는 뜻의 일본어인 이 말은 건설현장에서는 손톱을 자르듯 ‘임금을 잘라먹는다’는 뜻으로 지급이 미뤄진 ‘유보임금’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임금 정산일이 31일인 경우 7월1일부터 31일까지 일한 대가를 건설노동자들은 보통 8월이나 9월에 받는다. 첫달치 임금을 두세달 지나서 받게 되는 경우가 밥 먹듯 벌어지는 셈이다.

“우리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 열흘만 임금이 늦게 나와도 죽을 맛인데, 40일 이상 끌면 카드를 돌려막거나 사채를 끌어 쓰면서 버티는 수밖에 없다.” 박씨는 특히 “학교나 상가처럼 공기가 짧은 건설현장에서는 아예 임금을 떼먹히기까지 한다”고 절박한 심정을 털어놨다.

그는 “쓰메끼리의 근본 원인은 다단계 하도급 구조 속에서 저가낙찰을 하다 보니 시공업체나 하청업체가 부도가 나기 쉬운데, 그 위험성을 노동자에게 고스란히 떠넘긴다”고 울분을 토로했다.


유보기간이 길어지면 결국 체불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3개월이 지나도록 임금을 받지 못하면 결국 노동부를 찾게 된다. 하지만 노동부를 찾아간다는 것은 절망적이다. 임금을 지급해야 할 당사자가 도망을 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건설노동자는 신용불량자가 되거나 가정이 파탄나기도 한다.

다시 회사 쪽과 합의를 봤다는 당동 파업현장으로 돌아가 본다. 노조는 회사 쪽으로부터 ‘다른 작업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보장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불법 다단계 하도급 관행을 깨지는 못했다.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일지 모른다. 조그만 ‘쓰메끼리’를 거대한 타워크레인에 던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십장 출신 박씨는 “구조적인 문제는 어렵지만 계속 싸워나가야 한다”고 내게 힘줘 말했다.

손준현 사회부문 선임기자du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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