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영 수원대 교수 국토미래연구소장
지난달, 하천환경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랜돌프 헤스터 버클리대 교수를 따라온 박사과정 학생들이 4대강 현장을 답사하고 난 뒤 필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이런 끔찍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가?’ 필자는 답했다.
“첫째, 시장경제 국가가 발전하는 단계에서는 비경쟁부문인 공공건설 부문의 비중도 커지는데 공공건설 시장은 자유경쟁에 의해 조정되기보다는, 정치권력과 관료의 손에 의해 자원이 배분되고 담합이 상존한다. 미국도 그랬고 일본도 그랬다. 지금 지구촌의 성장국가는 어디나 정치와 토건경제의 유착이 존재한다. 문제는 그 힘이 환경파괴로 흐른다는 것이다. 이번 한국의 4대강 사건은 아주 심한 케이스라고 할까. 원래 이 부문은 일본이 당해 왔는데, 이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국이 된통 당하는 것 같다.
둘째, 이명박 대통령의 눈에 운하라는 콩깍지가 덮여 있다. 벗기기 어려운 콩깍지다. 그리고 인간적 개성에 해당하는 것인데, 대통령은 부러질지언정 굽히지는 않는 것 같다. 아마 물리적으로 혹은 재정적으로 공사 진행이 불가능해질 때까지 끌고 갈 것이다.”
‘당신은 어떤 생각으로 맞서고 있나?’
“이 사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자연의 힘을 제어하려면 엄청난 에너지와 돈이 드는데, 편익이라고는 얻어볼 길이 없는 일을 다음 정권에서 어떻게 유지하겠는가? 일찍 중단시키느냐 늦게 시키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요즘 댐(보) 폭파기술에 관심이 많다. 그나마 긍정적으로 본다면 우리가 이런 시련을 먼저 겪고 난 후의 경험과 교훈은 다른 나라에도 보탬이 될 만하다고 본다. 긍정적으로 보면 한국이 지구촌 환경문제 개선에 기여할 노하우를 축적하는 것이라고 할까.”
얘기를 나누다 보니까 말미의 긍정적 효과에 대한 생각이 솟아났다. 그러고 보니 우리 내부도 몇 가지 면에서 긍정적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첫째, 무엇보다 우리 안에 사(死)대강스러움이 있음을 알아챈 것이다. 수경스님은 늘,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내부에서 생명을 경시하고 한탕주의를 추구하는 사대강스러움을 몰아낼 수 있을 때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지적하신다.
돌이켜보면 한국 사회의 고질병인 부동산 문제의 본질은, 토건에 의한 인프라의 구축이 특정 토지의 미래사용가치의 현재화를 촉진함으로써 실제가치보다 훨씬 많은 거품성 가치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실물경제를 왜곡하는 원인이 된다. 이것이 계속되다 보면 투자와 산출의 경제 선순환 구조가 왜곡되고 불로소득이 만연하게 된다. 이처럼 한탕주의를 선호하는 듯한 국민들의 생각이 바로 사대강스러움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에 익숙한 이로 하여금 대통령이 되도록 한 것도 그렇고. 스님의 말씀은 이런 생각을 포함하여 그를 바탕으로 하는 삶 자체를 다시 세우자는 자각이다.
둘째, 이 사회의 양심세력이 연대하는 체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령 보수논객 이상돈 교수와 민주노총 간부도 한 배를 탔다. 작년에 4대강사업 심판을 위한 국민소송단을 함께 꾸린 것이다. 재미있는 일이다. 경우에 따라 좌우를 넘어 한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대단한 역량을 새삼 알게 되었다. 셋째, ‘4대강 찬양’이 인물의 옥석을 구분하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마치 땅속에 있던 두더지가 어둠을 찾아 밖으로 기어나오듯 그런 인사들이 모두 떴다. 가령 정운찬 전 총리에 대해 사람들은 기용 전후를 비교하며 어떤 평가를 할까? 정부나 정치권에 그런 인사들이 워낙 많아서 다음 정권은 인물 기용에 대한 정보를 확실히 알 수 있게 된 점은 큰 수확이라 할 만하다. 또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바와 같이, 중요한 사실을 은폐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보수언론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또다른 형태의 두더지가 아니겠는가? 이원영 수원대 교수 국토미래연구소장
둘째, 이 사회의 양심세력이 연대하는 체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령 보수논객 이상돈 교수와 민주노총 간부도 한 배를 탔다. 작년에 4대강사업 심판을 위한 국민소송단을 함께 꾸린 것이다. 재미있는 일이다. 경우에 따라 좌우를 넘어 한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대단한 역량을 새삼 알게 되었다. 셋째, ‘4대강 찬양’이 인물의 옥석을 구분하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마치 땅속에 있던 두더지가 어둠을 찾아 밖으로 기어나오듯 그런 인사들이 모두 떴다. 가령 정운찬 전 총리에 대해 사람들은 기용 전후를 비교하며 어떤 평가를 할까? 정부나 정치권에 그런 인사들이 워낙 많아서 다음 정권은 인물 기용에 대한 정보를 확실히 알 수 있게 된 점은 큰 수확이라 할 만하다. 또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바와 같이, 중요한 사실을 은폐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보수언론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또다른 형태의 두더지가 아니겠는가? 이원영 수원대 교수 국토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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