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순 대기자
후쿠도메 노리아키란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일본의 활동가들과 연구자들의 유기적 모임인 ‘강제동원진상규명 네트워크’ 사무국장을 맡아서 정력적으로 일해 한국과 일본의 관련 시민단체에서는 대단한 명사였다. 대구 계명대에서 일본어 강사를 하고 샤머니즘 연구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그는 한국말에 능숙해 모임이 있으면 사회를 도맡다시피 했다. 통역이 부족하면 즉석에서 구멍을 메웠다.
그가 광주민주항쟁 관련 행사에 참석했다 귀국한 뒤 지난 5월5일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건강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60살로 이승을 하직할 정도로 나쁘지는 않았다. 그의 역량과 친화력을 생각하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의 부음기사는 국내 종합일간지 가운데 <한겨레>에만 실렸다. 당시 일본 신문들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인터넷으로 둘러본 기억으로는 <아사히신문>에만 간략한 부보가 나왔다. 나는 이것이 일제강점 백년을 맞는 한-일 관계의 정확한 주소라고 생각했다. 한국과 일본 사회가 그다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인물로 취급하는 무의식의 반증으로 여겨졌다.
나는 국치 백년을 맞아 한겨레가 연재하는 기획물을 취재하면서 적지 않은 일본인들을 만났다. 식민통치기의 일들을 추적해야 하는 관계로 상대적으로 고령자가 많았다. 이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먼 옛날의 일로만 여겨졌던 ‘차별용어’들을 들었다. 일제 때 조선인들을 지칭했던 ‘센징’(鮮人), ‘한토(半島)상’ 등의 표현이 그냥 나왔다. 지금의 북한 지역을 가리키면서 ‘호쿠센’(北鮮)이란 말을 썼다. 차별 시비가 벌어졌던 민감한 용어라는 의식 자체가 없었다.
사실 보통 일본인에게 과거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그 상처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관심 대상이 아니다. 일본에서 조선인 희생자들의 흔적을 찾아다니다 보면 가슴이 막막하다. 변변한 표시판 하나 거의 없다. 전문가의 안내를 받아 설명을 듣지 않으면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알 방법이 없다. 그러면 다른 외국인 전쟁 피해자도 그럴까? 아니다. 영국, 네덜란드 등 연합군 포로 희생자들의 추도시설은 제법 있다. 패전 때 전범 추궁을 당할 것을 우려해 갑자기 십자가 탑을 세우는 등 급조한 것이다. 나중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빼곡히 쓴 석비들이 세워졌다.
패전 후 일본인의 집단적 기억 속에 꺼림칙한 조선은 통째로 지워졌다. 그런 이중성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수십년 전부터 지역에서 강제연행 실태조사에 나선 일본인들이 있다. 이들은 자료집을 내는 한편으로 한국의 유족들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고 독자적으로 유골반환 운동을 벌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드물기는 하지만 조선인 희생자 관련 추도비들이 세워졌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지자체도 이들의 활동을 반기지 않는다. 활동가들이 추도 관련 기념물을 세우려고 공원 터 등의 사용을 요구하면 관리기관은 번번이 거절한다. 그래서 개개인이 성금을 모아 구입한, 그래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사유지에 추도물이 등장했다. 일제 때 용어로 하면 이들은 적에 동조하는 ‘비국민’ 들이다.
이런 비국민들과 한국의 시민단체들이 1년 전부터 수없이 회의를 열고 올해 8월을 어떻게 맞이할지를 논의해왔다. 오는 22일부터 국치일인 29일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한·일 시민대회와 부대행사가 열린다. 지식인선언을 요란하게 다뤘던 한국 언론들은 시민대회 관련 기자회견 발표는 대부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우리 자신이 별로 관심이 없는데 일본 사회가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근본적으로 달라지기를 기대할 수 있나?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백년 담화가 시원치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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