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실장
여자들끼리 걷는다. 오래 벼르던 지리산 둘레길 3박4일 일정이다. 일행은 18명. 20대부터 50대까지 연령과 직종이 다양하다. 친구들끼리 오기도 하고 홀로 참여한 이도 여럿이다. 마을길을 걸을 때는 재잘거리지만 조금 가파른 오르막길 오솔길에서는 말이 없어진다. 저절로 묵언이다. 새소리가 들린다. 빗속 숲은 더욱 진한 향기를 내뿜는다. 발밑에 밟히는 흙이 촉촉하다. 그냥 맨발로 걷고 싶어진다. 은은한 연분홍빛 자귀나무 꽃에 넋을 잃는다. 원추리꽃일까 나리꽃일까, 주홍빛이 초록 숲 한가운데 아찔한 원색으로 도드라진다. 메꽃과 개망초도 지천이다. 지리산의 나무들과 꽃들에게 인사를 하며 걷는다. 바위와 구름과 빗방울과 안개와 돌멩이에게도 인사를 빠뜨릴 수 없다. 이 모든 존재들을 품어준 지리산 여신령님께 경례. 트레킹화와 양말을 벗고 비로 불어난 계곡물을 건넌다. 일행 중 용운씨가 센 물살 속에 버티고 서서 우리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 건너게 해준다. 그 말없는 따뜻함에 가슴이 뭉클하다. 다시 나뭇잎에 빗소리가 후드득거리는 숲속이다. 이렇게 완벽하게 아름다운 순간이라니! 느닷없이 행복해진다. 숨이 멎는 것 같다.
남들이 뽐내는 지리산 종주를 할 체력은 애시당초 없었다. 정말이지 이를 악물고 산길을 타는 고행을 일삼고 싶지 않다. 그래서일까, 지리산 둘레길에는 내 나이 또래 50대와 60대 여성이 많이 보인다. 여고동창팀, 모녀팀, 직장동료팀, 그들 또한 나처럼 숲길을 길게 걷는 시간을 오래 목말랐음이리라. 이 숲, 평화 속에서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어진다. “그래, 나는 참 훌륭해. 참 잘 살아왔어. 실수도 많았지만, 용서받지 못할 이유는 없어.” 기분이 좋아진다. 숲의 고요 속에 행복이 자급자족된다. 스스로 행복하기, 아무 이유 없이 행복할 수 있기. 그것이 홀로 서는 것이다.
방곡마을 회관에 도착한다. 부녀회의 점순씨가 우리 일행을 반겨 맞으며 나물과 묵은김치를 곁들인 돼지고기볶음에 막걸리를 내온다. 가족에게 밥상 차리는 게 직업인 우리들 모두가 그 정성 들인 저녁 밥상에 황홀해한다.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대접받는 것이 얼마나 황공무지한 일인지를 제대로 아는 건 아마도 수없이 밥상을 차려낸 여성들뿐일 것이다. 맛있다. 땀에 젖은 몸을 씻은 뒤 동그랗게 둘러앉는다. 명상 시간이다. 명상 안내를 맡은 광순씨가 모든 것에 감사하기 명상을 이끈다. 우선 내 튼튼한 몸과 잘 걸어준 다리가 고맙다. 나를 이곳에 보내준 남편과 가족에게 고맙다. 무엇보다 지리산이 있어줘서 너무나 고맙다. 정말 세상에는 고마운 일이 너무 많다. 하루 동안 이미 많이 착해진 우리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다.
다음날 굵은 빗줄기 속, 마을 오르막길 밭에서 팥 모종을 심고 있는 할머니께 인사를 한다. “할머니, 왜 비 오는데 일하시는 거예요?” “팥 모종은 비 안 올 때 심으면 죽어버리거든.” 윽, 무식해서 죄송합니다. 도대체 밭일, 농사일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없다. 어둑해질 무렵 남원 실상사에 도착한다. 절 어디에선가 “우리 삶의 중창불사”를 역설하는 도법 스님의 글귀를 만난다. 그래, 우리 안에 있는 불씨를 되살리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중창불사가 아니겠는가? 우리 삶에 이제 새로운 것이란 없다고 포기하지 말아야겠지.
고3 딸을 두고 온 은주씨가 말한다. “수시든 정시든 딸이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다시 올 거예요.” 딸의 손을 꼭 잡고 올 것 같다.
이제 다시 도시로 돌아갈 시간이다.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을 다시 더 사랑하기 위해서. 지리산의 너른 품 안에서 충전된 그녀들이 환하게 웃는다. 한동안은 지리산 배터리로 도시의 일상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지치고 우울한 그대들, 지리산으로 가시라. 말없이 작은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바로 그곳이 자기치유의 숲길임을 알게 될 터이니.
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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