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준현 선임기자
“모두가 바캉스를 떠난 파리에서 나는 묘비처럼 외로웠다.” 최승자의 시 ‘올여름의 인생공부’는 그렇게 시작한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묘지 같다는 생각을 하면 정말 끔찍하다. 밤마다 이 세속도시에 붉은 십자가들이 무덤에서처럼 하나둘씩 솟아오르지만, 그렇다고 굳이 염세적일 것까지는 없는데 왜 외롭다고 느낀 걸까. 내가 아직 여름휴가를 쓰지 않아서 그러려니. 휴가를 쓰지 않았으니 마음속으로는 아직도 여름을 보내지 않았다는 억지 주장.
여름휴가를 못간 까닭은 여러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아내가 ‘식당 알바’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온전히 하루를 같이 쉴 수 있는 짬을 내기 힘들었다. 휴가는 언감생심. 나 혼자 놀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놓은 것도 없으니 혼자 떠날 수도 없다. 이거 인생 완전히 헛 산 거 아니야? 아내는 일이 힘든지 짜증도 부린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일하지만, 정확하게 올해 최저임금인 시급 4110원보다 조금 더 받는 4300원 수준이었다. 처음에 일한 곳은 베트남 쌀국수 집이었다. 딸뻘 되는 아이와 같은 시급 4300원을 받았다. 국숫집에서는 여주인과 다툼이 있어 그만두고 나왔다. 감시하는 눈빛에다 노예 부리듯 하는 주인을 보면서 매사 따지기 좋아하는 아내는 처음부터 마뜩잖아했다.
그다음엔 주로 건설노동자들이 찾는 밥집이었다. 주인이나 동료와도 친하게 지냈다. 그곳에서는 시급 5000원을 쳐줘 상대적으로 좋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알바 자리는 계속 옮겨다녀야 한다. 아내는 최저임금을 받으며 요즘 나름 인생공부를 하고 있는 셈이다. 아내는 나를 쓱 쳐다본다. 눈빛이 ‘니가 인생을 알아?’ 뭐 이런 표정. 얼굴 위를 걸어다니는 저 시건방!
지난주 국가인권위원회의 산증인이랄 수 있는 한 과장이 사표를 냈다. 인권위를 죽 지켜봐온 시민단체 대표를 만났다. 그는 국가인권기구가 이명박 정부 들어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 있느냐며 개탄했다. 그(이하 그쪽)는 내게 물었다.
그쪽: 앞으로 하고 싶은 게 있느냐, 꿈이 뭐냐.
이쪽: 기자는 인터뷰당하는 걸 싫어한다. 사실 나는 꿈이 없다. 마틴 루서 킹 목사는 ‘나에게는 꿈이 있다’고 얘기했지만, 나에겐 꿈이 없고 오직 지금만 있을 뿐이다.
그쪽: 꿈이 없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 꿈이 있는 사람, 계획이 있는 사람은 응당 자기가 나서야 할 시점에도 ‘나중에 도모할 일에 지장을 줄까 봐’ 발언과 행동을 자제한다.
이쪽: 난 머리가 나빠 어젠다를 설정하는 능력이 없다. 하지만 현안을 피해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이렇게 얘기하고 보니, 과연 내가 늘 현안과 맞섰던가, 라는 회의가 든다. 나는 비겁하게도 얼마나 많은 현안과 쟁점을 비켜갔던가. 이제 와서 현안을 비켜가지 않았다고 우긴다면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불쌍하도다 나여, 숨어도 가난한 옷자락이 보이도다!) 최승자의 시 ‘올여름의 인생공부’는 이렇게 끝이 난다. “썩지 않으려면…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길모퉁이 여관 2층에 장기투숙중인 운명철학자에게 상담을 받는다고 인생공부가 될 리는 만무하다. 그러니 올여름 내 인생공부의 정답은 ‘현안을 후벼 팔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일 수밖에. 손준현 선임기자 dust@hani.co.kr
이쪽: 난 머리가 나빠 어젠다를 설정하는 능력이 없다. 하지만 현안을 피해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이렇게 얘기하고 보니, 과연 내가 늘 현안과 맞섰던가, 라는 회의가 든다. 나는 비겁하게도 얼마나 많은 현안과 쟁점을 비켜갔던가. 이제 와서 현안을 비켜가지 않았다고 우긴다면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불쌍하도다 나여, 숨어도 가난한 옷자락이 보이도다!) 최승자의 시 ‘올여름의 인생공부’는 이렇게 끝이 난다. “썩지 않으려면…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길모퉁이 여관 2층에 장기투숙중인 운명철학자에게 상담을 받는다고 인생공부가 될 리는 만무하다. 그러니 올여름 내 인생공부의 정답은 ‘현안을 후벼 팔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일 수밖에. 손준현 선임기자 dust@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